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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에 다녀와서, 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 회보』 39호(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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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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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에 다녀와서

    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 회보』 39호(1999)]


    "양쪽의 감시원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섞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남쪽 할머니들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이들도 따라 춤을 추었다. 여기에는 조동걸 교수 일행도 끼어 있다가 춤을 추었다. 이것이 대동춤이다. 이들 춤에는 분명히 이념과 체제가 없었다. 남루하거나 화려한 차림의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뒤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담벽 밑으로 가서 한참 울었다. … 우리는 바늘구멍이라도 막지 말자. 그리고 금상산을 더립히지 말자. 그들의 찌든 삶을 비웃지 말자. 금강산에 놀이하러 가지 말고 느끼러 가자."

    나는 지난 6월 초순, 신록이 한창 우거질 적에 금강산에 다녀왔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의 서성숙 과장이, 그 동안 글 쓰느라 골치가 아플 테니 금강산에나 한번 다녀오라는 배려였다. 글쓰는 계획도 차질을 빚고 있었고, 어려운 구제금융시대에 살면서 혼자 유람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처음에는 주저했다. 초봄에 나의 고려사출간 기념으로 금강산기행을 준비했다가 준비가 부족해 중단한 적이 있었다. 금강산 길은 북쪽 땅으로 들어가는 바늘구멍 만한 통로가 아닌가? 또 유홍준 교수가 기행 팀을 이끌고 가는 속에 끼라고 하니 모처럼 그 친구의 입담도 들어 볼 만하다고 여겼다. 유교수도 함께 가보자고 권유했다. 그래서 처음과는 달리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30여 년 전부터 틈만 나면 역사유적을 찾아다녔다. 초기에는 지리산 언저리에 발길을 가장 많이 돌렸다. 그곳에는 내가 당시 공부하던 소재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왕봉에 꼭 네 번 올랐다. 이런 탓으로 한길사에서 펴낸 『역사기행』에 「지리산의 정신사」라는 기행문을 쓴 적이 있었고 한길사 중심의 역사기행모임에서는 지리산에서 이름도 남기지 않고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굿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김언호 사장이 나에게 그 제문을 지으라는 부탁을 해와서 ‘제지리산영혼문(祭智異山靈魂文)이라는 제문을 지어 낭독한 적이 있었다. 이런 속에 나의 지리산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나는 한국의 정신사를 공부하면서 김시습과 서경덕 계열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계열의 인사들은 산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금강산에도 자주 다녔다. 김시습의 제자뻘인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記)」도 읽었고 최남선이 쓴 「금강예찬」도 읽었다. 이 둘의 금강산 기행문은 경치를 소개한 기록으로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치를 상찬했을 뿐 거기에 여러 정신사에 얽힌 이야기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김시습의 행각도 하나 적지 않았다. 이이는 젊을 적에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된 적이 있었는데 뒷날 「풍악행(楓岳行)」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쓰면서 자신의 고뇌와 현실관을 섞어놓았다. 이이의 금강산 기행시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래서 금강산과 지리산을 대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서울에서 출발하는 버스에는 겉보기에도 나이 든 지식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동행에는 예전 동아일보에서 근무할 때에 알고 지낸 조영철 교수 부부도 타고 있었다. 나는 봉래호의 방 한 칸을 차지하였다. 나만이 가족동행이 없었고 또 유교수와 바둑을 두기 위해 독방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봉래호에는 조동걸 교수와 박종기, 박광용, 장석흥 교수 등이 한 패를 이루어 타고 있었다. 나는 잠을 설치다가 혼자 새벽녘에 갑판 위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나와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장전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강산이 뒤에 시커먼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북한 해관 족으로 접안하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동행에는 안영찬 선생이 끼어있었다. 안 선생은 장전읍에서 금강산중학교에 다니다가 48년에 남하한 분이었다. 강서구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데 내 ’주치의‘인 선왕주 선생과 한 마을에 살면서 아주 친한 사이라는 걸 알았다. 주치의라는 표현은 걸맞지 않으나 선왕주 선생이 스스로 붙인 것이어서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다. 나는 안 선생을 붙잡고 예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월남할 적의 사정 따위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장전에 살았던 사람을 쉽게 만날 것 같지도 않고 기행의 좋은 증언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북한의 장전해관을 거쳐 미니버스에 오르자 이제 정식으로 북한 땅을 밟았구나 라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경색된 표정으로 중간중간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더욱 북한땅을 밟고 있다고 느겼다. 미니 버스는 철조망을 한동안 지나 콘크리트 장벽으로 가로막힌 온정리를 스치고 있었다. 우리가 마을을 향해 손을 흔들자 조금 전의 보초 선 군인과는 달리 주민들은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조금 더 나아가자 김정일 휴양소가 나왔다. 휴양소 안은 한산한 듯이 보였으나 휴양소 운동장에는 어린이, 젊은 남녀, 노인들이 어우러져 아침부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담벽과 이들을 보면을 보면서 연속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모든 것이 장벽일 뿐, 대화의 마당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인가?

    첫날 코스인 만물상 입구에 늘어서 있는 미인송의 밑등에는 군데군데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때 양쪽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면서 남긴 총탄의 상처라 한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작은 총탄흔 적이 세월에 묻어 아물기는커녕 더욱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양쪽의 감정도 그 동안 이처럼 벌어졌던가? 하나의 기묘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걸어 올라간 길 입구부터 북한의 안내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안심대의 안내원 엄영실 양은 유교수와 이미 아는 사이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유교수는 고은 선생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 엄양으 금강산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소개받고도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들과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밥 먹었으냐, 어디 사느냐, 예쁘다, 잘 생겼다”는 따위 농담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만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우리는 극도로 말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고 또 자극하는 말을 삼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수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관광객이 안내판을 읽다가 “위대한...” 어쩌고 하는 대목을 보고 “웃기네”라고 내뱉었겠다. 이를 들은 안애원이 끌고 내려가서 남쪽말로 시말서를 쓰고 벌금을 물리고 나서 현장에 유폐시키고 있다가 배로 되돌려 보내고 다음날 구룡폭포의 관광을 금지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없는 사람이었을까?

    어쨌거나 네 시간이 넘는 산행을 마치고 나서 입구의 개울가에 모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맑은 한하계(寒河溪)의 물에 발을 씻지도 않았고 휴지 조각 하나 버리지도 않았다. 백 달러가 넘는 벌금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누구나 “산에 휴지조각 하나 없다”고 말하고 “물이 너무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심정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리산의 분별없는 개발을 나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날에는 신계사터를 지나 구룡폭포의 코스로 갔다. 여기에는 들어가는 길목부터 절벽과 바위에 김일성, 김형직, 김정숙, 김정일 일가를 찬양하는 글씨로 가득했다. 역사학자의 감각으로 볼 적에 이런 모습은 좋은 역사자료였다. 금강문과 앙지대(仰止臺)를 지나자 웬만한 바위에는 빈틈없이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금강문은 금강산으로 들어간다는 문이요, 앙지대는 외경의 마음으로 산을 바라본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 이름 석자를 새겨 놓기에 바빴던 것이다. 더 깊은 옥류동으로 접어들자 그야말로 가관이다. 골에 널려있는 바위에 빼곡이 성과 이름ㅂ, 때로는 관직, 때로는 호를 곁들여 새겨놓았다. 어떤 것은 새로 설치한 잔도 속에 묻혀버리기도 했고 어떤 것은 사람들이 짓밟고 다니기도 했다.

    상팔담의 뒤편 정상인 구룡대에 드러난 나무 뿌리에는 근래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새겨놓은 듯한 성명들도 보였다. 바위에 새기면 벌금을 물게되니 나무 뿌리에라도 새겨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나는 경치를 보기보다 이런 이름들을 찍거나 적기에 바빴다. 그래서 가장 늦게 처졌고 필름마저 바닥이 나서 겨우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구룡폭포 아래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룡폭포 아랭[ 서 있으니 물보라가 팔을 적셨다. 그 한기가 온 몸에 전달되었다. 그 아래 이런 글귀를 적어놓았다.

    ‘천 길의 흰 용, 만 섬의 진주(天丈白龍 萬斛眞珠)’

    초서닌 이 글씨 중에 최남선은 백룡을 백련(白鍊)이라 써 놓았으나 나는 백룡으로 읽었다. 글씨가 마모되어 있었다. 어느 것이 확실한 지는 모를 일이나 백룡이 더 기상이 있을 듯했다. 옆에 최치원이른 각자가 있다. 그 밑이 다시 이런 글귀가 있다.

    ‘성난 폭포, 가운데로 쏟아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어지럽게 한다.’

    옆에 “우암 선생의 글씨를 을축년 봄에 삼가 보고 갑인 여름에 고쳐 새긴다”고 쓰여있다. 그러니 송시열의 글귀와 글씨를 다른 사람이 새겼다는 말이다. 최남선은 이 구절을 소개하면서 누구의 글귀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유교수와 나는 최치원이 정말 썼을까, 송시열의 글귀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따위의 말을 주고받았다. 앞의 것은 최치원다운 기상이 보였고 뒤의 것은 송시열다운 서슬이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이외에도 몇 개의 글귀들이 보였고 단순히 성명만을 새긴 것도 여럿 있었다. 모두 사람들이 짓밟고 다녀 모양이 영 우습게 되었다. 구룡폭포의 옆 절벽에는 큼직하게 미륵불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것은 개인 성명이 아니어서 조금 품위가 있어 보였다.

    자, 이들 성명들은 금강문에서부터 대충 헤아려보니 모두 1천여개쯤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안목으로 살펴보니 달성 서씨, 풍양 조씨, 안동 김씨, 여흥 민씨, 파평 윤씨, 풍산 홍씨, 연안 이씨 등의 인사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19세기 세도가 집안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강원도 관찰사 따위 벼슬아치들의 이름이 많이 보였다. 거의 탐관오리들이었다. 단재상 시상식이 끝난 뒤 내가 이를 두고 조금 분개한 어조로 말하자 강만길 교수는 이범진이라는 이름은 보았느냐고 물었다. 이범의 이름은 옥류동 아래쪽 개울 중간에 새겨져 있었는데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그 이범진이라면 그 중에서 가장 나은 인물일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이름을 새겼을까? 이들은 많은 종과 수행원에게 술과 고기를 돌리고 기생을 데리고 여기에 올랐을 것이다. 또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업혀 냇물을 건넜을 것이다. 이들 속에 연장을 든 석수를 끼워 넣어 데리고 올랐던 것이다. 제 손으로 돌을 팔 리가 없었다. 당시로는 많은 경비가 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름을 새겨놓은 자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마구 밟고 다니고 또 정통 역사가도 못돼 보이는 이이화 같은 자가 헐뜯는 글을 쓰는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지겠지만 나는 이를 참을 수가 없다. 뭉개버리고 아름다운 구룡계곡을 보고 싶은 것이다.

    너무 이 이야기에 매달린 것 같다. 아무튼 하루 일정 속에서 뒤따라온 양재혁 교수 가족도 만났다. 그도 아마 나와 같은 심정으로 금강산을 찾았을 것이다. 우리는 온정리에 둔 휴게소로 돌아왔다. 마침 건터편 김정숙 휴양소 옆 마당에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제에 연이어 메이데이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쪽 관광객들은 우루루 몰려갔다. 중간의 길을 3.8선으로 삼고 관광객들은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구경하던 할머니는 “막걸리 한 통, 두부 한 모도 없이 춤을 추네” 라고 말했다. 마이크에서는 연속 힘찬 곡조가 흘러 나왔다. 일부러 여기에서 한 판 벌였을 것이다.

    양쪽의 감시원들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섞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남쪽 할머니들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이들도 따라 춤을 추었다. 여기에는 조동걸 교수 일행도 끼어 있다가 춤을 추었다. 이것이 대동춤이다. 이들 춤에는 분명히 이념과 체제가 없었다. 남루하거나 화려한 차림의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뒤로 물러 나왔다. 그리고 담벽 밑으로 가서 한참 울었다. 아마 북한산 용성 맥주 두 깡통을 비운 것도 누선을 자극하는데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이런 눈물은 두만강과 압록강과 천지의 물에도 보탠 적이 있었다. 멜로 드라마를 보면서도 우는 수준이니 그저 얄팍한 감상일 뿐이다.

    그날 밤 배에서 기어코 참아오던 소주를 마셔버렸다. 너무 감상에 빠졌다. 바둑도 내리 져버렸다. 조용철 교수는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사람들은 감상을 이야기하면서 말을 자제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꾸짖는 말보다 ’금강산 통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구경한 금강산은 20분의 1정도였다.

    여기에 대한 아쉬움보다 북한땅을 밟았다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운동권 출신의 의사요, 내 글의 독자인 이화영 선생은 나에게 금강산 만폭동을 두루 돌아볼 때까지 오래 살라고 했다. 김시습의 이야기보다 오늘의 사정에 더 관심을 보인 모습들이다.

    우리는 바늘구멍이라도 막지 말자. 그리고 금상산을 더립히지 말자. 그들의 찌든 삶을 비웃지 말자. 금강산에 놀이하러 가지 말고 느끼러 가자. 그러니 골프장이나 나이트클럽보다 개울의 맑은 물을 소중하게 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