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 연구소


          
  과거사 정리 목적은 집단기억 만들기/과거사에 '딴스홀'을 허(許)하라 7968
   관리자   2004-09-21

 


* 아래 두 글은 각각 경기대 김기봉 교수([중앙] 2004.9.19)와 중앙일보 노재현 문화부장([중앙] 2004.9.9)가 쓴 것입니다. 찬반을 떠나 '읽어둘만한' 견해인 것 같습니다.

과거사 정리 목적은 집단기억 만들기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역사전쟁 중이다. 밖으로는 중국과 고구려사로 외교마찰을 빚었고, 안으로는 과거청산으로 내전 중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역사가로서 나는 우리 사회가 '역사의식'은 과잉돼 있지만 '역사인식'은 결핍돼 있음을 염려한다. 이것을 나는 네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본다.

첫째, 역사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정치가 역사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모든 역사논쟁은 정치논쟁이다. 하지만 역사논쟁 주도권을 정치가가 가질 때 역사의식은 과잉되고 역사인식은 황폐해진다. 동북공정은 정치문제에서 비롯했지만, 중국정부는 학문적 문제라고 발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적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 과거사 정리도 마찬가지다.

둘째, 역사 학문화를 위해서는 먼저 탈도덕화가 요청된다. 근대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역사학의 임무는 과거의 재판이 아니라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했다. 랑케의 이 말은 근대역사학을 성립시키는 모토가 됐다. 만약 랑케가 일제식민시대 역사를 쓴다면 어떻게 쓸까. 함석헌 선생의 증언처럼 "해방은 도적처럼 왔다." 그 시대 대다수 사람은 일제 패망이 목전에 와있음을 모르고, 일제 신민으로 사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조국 광복을 신앙처럼 믿고 메시아를 맞이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애국지사를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도적같이 찾아온 해방을 맞을 준비를 못한 대다수 사람을 역사에서 제외시켜야 하는가. 그들은 분명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다면, 역사가는 먼저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지 면밀히 밝혀야 한다. 후대 관점으로 과거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건 역사학의 상식이다.

각 시대는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친일파'의 행적은 청산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우리 정체성의 일부다. 역사학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식민지 근대'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로 존재하는 근대를 부정하는 태도다. 일제시대 과거사 정리는 청산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일부로 포섭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셋째, 과거사 정리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집단기억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월리엄 맥닐의 말대로 "인간을 진정한 사회적 동물로 만드는 것은 집합기억으로서 역사다." 사회통합적인 집단기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심판과 복수가 아니라 반성과 해원(解寃)의 자세가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는 정리하기 정말 어려운 과거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 정리는, 이영훈 교수의 말대로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었다는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성찰의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일본인 남성뿐 아니라 조선인 남성도 연루됐다면, 민족이라는 특수한 가치에 입각해 단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일제시대를 넘어서 미군이라는 또 다른 외국 남성에 의해 생겨난 '양공주', 그리고 개발독재 시대 '기생관광'까지 국가의 묵인 아래 자행된 여성의 성착취는 민족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젠더와 보편적인 인권 문제다. 자기반성과 고해성사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사 정리는 없다. 자기 부정과 타자 인정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만이 기억의 미래화가 가능하다. 한국 근현대사는 어둡고 청산해야 할 과거만이 아니라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는 유사 이래 한국인의 오랜 꿈을 실현시킨 시기다.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를 위해 역사의 탈정치화와 학문화가 요청된다.

끝으로 오늘의 한국인은 민족사적인 좁은 시야에서 탈피해 세계사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미하엘 가이어 주한 독일대사는 요즘 한국은 홀로 서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고조된 반미 감정과 일본 및 중국과의 역사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면 한반도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협조없이는 우리 생존마저 위협받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역사의식 과잉과 역사인식 부재는 역사의 이로움보다 해로움을 가져와 우리삶을 병들게 한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 서양사


과거사에 '딴스홀'을 허(許)하라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처리 문제로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 와중에 여당 정치인 두어명이 낙마하거나 흠집이 났고, 나머지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하고 있다. 그런 소음들을 귓전에 흘리면서 최근 몇권의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우선 역사학자 박지현(35.서원대 세계지역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씨가 쓴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비시 프랑스와 민족혁명'(책세상).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패한 프랑스 땅에 세워진 비시 정권이 사실은 독일의 강압보다는 프랑스 정치인.지식인들의 자발적인 대독(對獨) 협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소상히 밝힌 저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프랑스는 우리 과거 청산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많은 이가 일제 치하의 한국인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며 "그러나 자발적으로 친일이나 독립운동을 한 자들보다 시대적 조류에 따른 인간 조건에 순응하며 지내야 했던 자들이 훨씬 많았다"고 말한다. 당연해 보이는 박씨의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눈에 핏발 세운 근본주의자.원리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그만큼 드세기 때문일 것이다.

나영균(78)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황소자리)의 재미도 앞의 책 못지 않다. 나 교수의 부친(나경석)은 일제하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까지 다녀왔다. 저자는 사회주의자로 평생 나라를 걱정하며 산 나경석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여류음악가 윤심덕은 김우진 이전에 먼저 나경석에게 "함께 죽자"고 졸라댔다고 한다)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출판평론가 표정훈(35)씨의 '나의 천년'(푸른 역사)도 아버지.할아버지 등 핏줄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의 할아버지(표문학)는 일제하 공산주의자. 1988년에 표정훈씨는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 교보문고에 들른다. 서가에 꽂힌 마르크스.레닌 계열의 책을 본 할아버지가 호기심에 차 손자에게 묻는다. "너희들 아직도 이런 책 읽느냐?"

세권의 책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는 세상살이의 복잡함과 중층성이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표문학은 한때 같은 남로당원이던 박정희가 세운 정권에서 새마을 운동에 투신한다. 이유는 '그(박정희)가 추진한 국가발전 계획에서 초기 소비에트공화국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후세들이 늦게 태어난 것을 이점 삼아 이런 아이러니를 감히 비웃을 수 있을까.

1999년 출판돼 화제를 몰고 왔던 김진송씨의 책 '서울에 딴스홀을 許(허)하라'를 떠올린다. 책 제목은 37년에 다방 마담과 여급.기생 등이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해 달라"며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탄원서에서 따왔다. 굳이 신문화사.미시사라는 학술용어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서울에…'에 담겨 있는 일제하 조선인들의 사는 모습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이분법이 얼마나 거친 분류인지를 웅변해 준다.

그 복잡하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단칼에 잘라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렉산더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탈이다.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풀 필요가 있다. 지나친 단순화는 반(反)지성으로 전락하기 쉽다. 하기야 요즘엔 이런 말만 꺼내도 "과거를 청산하지 말자는 거냐"는 지청구를 듣는다. 그래도 한 마디 부탁하고 싶다. "과거사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그래야 독립운동가들의 삶도 더욱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노재현, 중앙일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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