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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석종의 역사관과 민중사적 시각, 이이화(『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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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2,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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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종의 역사관과 민중사적 시각
    이이화(『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1945년 이후 분단 구조와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에서 한국 사학계는 한동안 식민지 유산을 채 청산하지 못하고 그 잔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대학사회를 지배한 사학자들은 거의 일제의 식민사학을 공부한 인사들이었고, 그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조사관 또는 우파의 사조와 경향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병도·신석호·이선근 등으로 대표될 것이다. 여러 시대 상황에 따라 근대사의 이론이 정립되지 못한 학문 풍토에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재정립하고 타파하려는 소장 연구자들이 1970년대 맹렬하게 학문 활동을 벌여 업적을 쌓았다. 특히 이들은 민족 문제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이승만 독재 정권과 박정희의 군사 정권, 그리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방황과 고통을 겪었다. 모순과 갈등의 시대에 역사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역사가 현실에 맞서 교훈과 무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가 떠올랐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김용섭·조동걸·강만길·정창렬·정석종·신용하·이만열 등이었다.

    이들 소장 그룹의 한 멤버인 정석종은 기존의 연구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민중사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먼지 속에 파묻혀 사장(死藏)되어 있는 사료 발굴도 병행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사학계를 이끈 리더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논문의 경향과 이론을 몇 가지로 분류해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1. 조선 후기 정치사와 민중운동사

    조선 후기에는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사와 기층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민활하게 전개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종식된 뒤 조선 후기 사회는 전쟁 없이 안정을 누렸다. 그 시기 정치권력을 놓고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게다가 주자 사상으로 무장한 성리학자들은 당쟁과 연결되어 이른바 공리공담으로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실학파들이 일어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실질 있는 학문을 추구해 개혁 사상을 제창했다. 이어 영정조 시기에는 국왕이 실학의 개혁 사상을 옹호하면서 탕평정치를 펴서 당쟁을 억제하려 했다. 한편 서얼과 노비를 중심으로 한 기층민은 기존의 모순을 청산하고 새 사회를 열망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해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석종은 이런 시대 상황을 파고들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숙종조 기사환국을 중심으로」였다. 이 논문을 기반으로 18세기와 19세기 정치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면서 민중운동사를 정치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의 과제 II―민중운동사 연구를 중심으로」에서는 민중의 저항운동을 정치사의 한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논지를 폈다. 그는 이렇게 전제했다.

    모든 역사 현실은 정치 현실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조선 후기의 경우도 다른 분야의 연구 못지않게 정치사의 연구가 요청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 현실이란 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조화되거나 폭발하여 이루어지는 현상이므로 조선시대의 정치사도 그 같은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피치자 계층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인가? 바로 사회개혁 운동과 민란을 주도한 민중이었다. 이들 민중으로 비밀결사체인 살인계(殺人契)를 예시할 수 있다. 그들은 양반에게 압박 받는 노비들의 권익을 찾아주려 했다. 천민들로 구성되어 악덕 지주를 타도하고자 했던 명화적(明火賊)도 있었다. 이들은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저항했다.

    그들은 노비의 양인화, 각종 잡역의 금지, 노비 노동 대신 고공제(雇工制)의 실시, 천민에 대한 형벌의 완화, 유한 양반들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양반의 양인화 등을 내걸었다. 그들의 행동 강령은 양반을 살육할 것, 양반 부녀를 겁탈할 것, 양반 부호의 재물을 탈취할 것 등이었다. 또 그들은 새로운 이상사회를 열망해 『정감록』을 빌려 새 정치 세력으로 진인출래(眞人出來)를 퍼뜨리고 진인을 찾아 추대했다. 이어 미륵 신앙을 빌려 석가의 시대가 가고 미륵이 출현해 이상사회를 연다고 선동했다.

    한편 천민들만이 아니라 상인, 역관, 무인, 서얼 등 중인들의 움직임도 포착했다. 역관들은 무역으로 축적한 재부를 이용해 정권 탈취에 나섰다. 정석종은 그 예시의 하나로 창우(倡優) 출신의 극적(劇賊) 장길산을 들었다. 장길산의 활동을 정치 세력과 결탁해 나타난 것으로 분석했다.

    1687년(숙종 13)부터 활동을 본격화하는 극적 장길산 부대의 활동으로 상징될 수 있다. 장길산 부대의 활동은 1697년경에는 산간의 승려 세력과 한성 내의 서류(庶流)들과 결탁되어 봉건 정권을 뒤엎으려는 계획에도 관련되고 있다.

    마지막 민중운동사의 과제에 대해 그의 논지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는 살인계와 같은 비밀결사체가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고, 중인까지 가담했던 미륵 신앙을 받드는 조직도 민중 사이를 파고들었으며, 노비들도 몰락 정치 세력과 결탁해 정권 탈취에 가담했고, 경종과 영조 재위 시기 전개된 조선 후기의 모든 사회운동은 향촌의 사회 조직과 관련되어 나타나므로 민중운동사의 한 영역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갈파했다.


    2. 민중운동사와 『추안급국안』

    조선 후기, 정변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정치 투쟁의 중심인물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신임사화 같은 경우, 당파의 기준에 따라 충신과 역적이 갈렸다. 여기에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그들은 낮은 신분층으로 중인, 상인, 서얼, 그리고 노비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변혁운동 과정에 사로잡혀서 신문과 재판을 받았다. 그 사료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다. 정석종은 이 사료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정리했다.

    『추안급국안』은 국사범, 곧 왕조를 전복하려는 중범을 비롯해 노비가 상전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거나 능멸한 범죄를 조사·신문·재판한 기록이다. 국왕이 직접 참여한 친국(親鞫)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 전기 선조 재위 시기부터 마지막 대한제국 성립 이전까지 분책(分冊)해 엮여 있다. 여기에는 이두 등 전문 용어가 사용되어서 독해하려면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정석종은 이를 분석하고 해설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는데 「조선 후기 민중운동사 서설―추안급국안을 중심으로」는 그 성과를 총괄해서 다룬 것이다.

    『추안급국안』은 잡초에 비유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사료는 취사선택해 정리하여 완성본을 만든 것이지만, 『추안급국안』은 사실 그대로 적어 해서(楷書, 정자체)로 보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진실을 파고들 여지가 많은 자료였다.

    그가 정리한 제첨(題簽, 내용)을 보면, 1601년의 역모 사건을 비롯해 1866년 사옥(邪獄, 천주교 관련)에 이르기까지 331건이 수록되었다. 역모 사건뿐만 아니라 1562년 임거정사(林巨正事, 임꺽정 이야기)와 상전과 부모와 남편에 관련되는 살인 사건 등 강상죄(綱常罪)까지 망라되어 있다. 또 중앙의 정치 세력과 향촌사회의 지배 세력 또는 상인 계층이 연합해 민중을 끌어들이는 실상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세도정치 시기,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정을 알려주는 사옥과 관련해 정약용의 신문 기록과 동학 지도자 최시형과 관련되는 이필제란, 흥선대원군과 연관된 임오군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민중운동에서 나타나는 흉서(凶書), 괘서(掛書), 투서(投書) 등이 거의 언문 그대로 게재되기도 했다. 정석종은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우리는 종래의 민중운동사가 대체로 새로이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을 앞 『추안급국안』 속에서 적출하여 기왕의 운동사 내용에 첨가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가 이 사료를 정리해 영인본으로 간행한 것은 민중운동사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사료의 가치를 인정해 후학들의 번역 작업도 이루어졌다.


    3. 독보적 관서농민전쟁 분석

    정조가 죽은 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들어서서 모든 정치권력을 독점했다. 1812년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관서농민전쟁(홍경래난)이 유발되어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로 만드는 단초를 열었다. 정석종은 민중운동사의 일환으로 이 사건을 주목해 사료를 정리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발굴한 관련 사료로서 『관서신미록』, 『진중일기』, 『안릉일기』, 『홍씨일기』 등이 있다.

    그는 이들 사료를 종합해 검토하고 이병도 등 기존 연구를 섭렵해 ‘홍경래난’의 성격을 규명했다. 이 논문은 발표 당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일반적으로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는 1860년대의 진주민란이나 동학농민전쟁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와 같은 연구 동향은 우리나라 봉건사회의 붕괴 및 해체 시기를 이때로 추정하고 있는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라고 전제하였다.

    이 논문에서 정석종은 사회적 배경을 폭넓게 살피면서 무전농민(無田農民)과 유민의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이어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의 참여를 주목해 상인 세력의 정치참여를 지적하고, 향촌사회 중산층의 동향도 주목했다. 그리하여 단순한 지역 차별이나 노비의 보복 심리만이 봉기의 동기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참여층의 새로운 문제 제기를 했다.

    경영형 부농층과 대상인층이 봉기군의 지휘부에 포진하는 것과 함께 이들과 이해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대립 관계에 놓이지 않던 계층이 봉기군의 일선 하층 군병층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경영형 부농층과 대상인층은 하층 농민층을 그들의 계층적인 성격 때문에 난의 우군으로 삼지 못하고 광산 노동자층을 그들의 우군으로 하층 일선 행동군병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 한계를 지적하고는 있지만, 경영형 부농층과 대상인층의 연계관계를 설파한 것은 종래의 이론과 사뭇 다른 정석종의 새로운 문제제기였다. 결론으로 “홍경래난은 1860년대의 임술민란과 1894년대의 동학농민전쟁 등과 단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며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역사의식을 보였다. 그는 홍경래난이 반봉건을 내건 19세기 ‘민란의 시대’를 열었다고 설파했다. 그의 대표적인 논저는 관서농민전쟁에 관련되는 일련의 글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석종은 만년에 들어 한때 실학자를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을 파고들었다. 그는 다산의 제도 개혁 이론에 빠져 이를 반봉건 민중운동의 대안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공동소유-공동경작-공동분배의 이론을 내건 여전론(閭田論)에 주목해 토지개혁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그는 만년에 다산에 관련되는 논저를 몇 편 발표했지만, 그 연구는 미완으로 남았다.

    또 그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즈음해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농민군 3대 지도자라 일컫는 손화중의 손자인 손홍렬의 증언을 채집하는 등,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했지만 병마에 시달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이른 죽음이 너무도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