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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화 선생님을 추모하며, 정석희(역사문제연구소 후원회원,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충남유족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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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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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선생님을 추모하며

    정석희
    (역사문제연구소 후원회원,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충남유족연합회장)

    선생님이 우리 한국전쟁 피해유족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운명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후반기인 2000년 9월 전국유족협의회와 민간인학살 관련 전국사회단체 그리고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 일반시민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범국민회)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벌써 세월이 흘러 올해가 범국민회의 창립 20주년이 되는군요.

    범국민회의 출범은 처음 의욕과는 달리 후원자의 후원금이나 소액회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자금조달이 활동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자금난 해결을 위해 선생님 스스로가 자신의 집필에서 얻어진 인세마저 쏟아 붓는 헌신적 노력이 뒷받침되어 초창기 범국민회의 어려운 살림을 꾸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범국민회의 존립자체가 처음부터 위험한 지경이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기 직간접으로 힘을 모아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해동 목사, 박재승 변호사, 임태환 목사, 남지대, 박명림, 강정구, 강창일, 홍순권, 김동춘, 정근식 교수와 한대수, 장완익, 이춘열, 이영일, 이창수씨 등과 유족으로는 문경의 채의진, 진주의 김영훈 공동대표, 진영의 김영욱, 김광호 부자, 순천의 장준표, 산청의 정맹근, 대전의 김종현, 보성의 윤호상 등, 특히 여자 삼총사로 불리던 강화의 서영선, 대전의 정혜열, 임실의 박봉자와 그 중에선 막내였던 고양 금정굴 유족인 마임순, 이경숙과 여수의 김화자 등 여성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입법투쟁의 열기를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무현 참여정부가 시작되던 2003년 2월 27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가 점거농성을 시작한 게 본격적인 장외투쟁의 서막을 열게 되었고, 2003년 4월 1일 부터 농성장을 국회 앞으로 옮겨 강경투쟁에 나선 것은 과거사입법의 물고를 트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려 5년의 입법투쟁 끝에 2005년 5월 3일 드디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 해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었으나 기대와는 달리 사면복권 등 명예회복 조치 특히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이 시효와 관계없이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논의 조차 없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서둘러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사 청산 작업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진전을 이루긴 했으나 누더기법의 탓인지 제한적인 조사활동 등 이명박 정부의 뒤집기 시도 까지 더해지면서 여전히 미완성의 과업으로 남아 있음을 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역사는 옛날 일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토대를 두고 지난 일을 읽어내고 정의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며 역사인식이 결여된 역사가는 한낱 기록자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으로 초청하게 된 것은 2011년 11월 12일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던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태안군 합동위령제 때 입니다. 이명박 보수정권의 종북몰이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라 수십 년을 빨갱이자식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기죽어 지내던 유족들에게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아쉽고 목마른 때였습니다. 기댈 곳 없는 우리 유족들에게는 선생님 같은 큰 어른이 계시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고 자랑이었는지 모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전국방방곡곡 이승만의 학살광풍을 피해간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태어난 태안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태안 인구의 5%에 이르는 민간인 1,050명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항쟁 때에는 충남 내포지역의 마지막 항전지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406명의 농민군이 학살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표적 학살장소인 백화산 중턱 교장바위 아래에 세워진 갑오동학농민혁명 추모탑에는 선생님이 친히 쓰신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빨갱이 타령을 입에 달고 사는 수구세력들의 극렬 탓인지 한국전쟁 피해 유족들이 주관하는 모임에는 여야를 떠나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참석을 꺼리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의지할 데 없는 저희로서는 궂은일에 항상 앞장서 주시는 선생님을 모셔 덕담을 듣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살아온 유족들에게 선생님은 곧 아버지 같았고 형님 같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작년 10월 19일에 있었던 충남합동추모제에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도 같은 바램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저의 마지막 모심이 될 줄이야? 오늘 선생님의 영정 앞에 서게 되니 한없이 죄스럽고 황망합니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한국전쟁희생자 추모제 때에는 선생님의 그 카랑카랑한 사자 후는 어디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이념의 잣대로 배척당할 때가 가장 힘드셨다던 선생님의 말씀이 더욱 새롭습니다.

    그 동안 지셨던 무거운 짐 모두 내려 놓으시고 부디 평안한 영면을 누리소서

    (사)충남유족연합회장 정석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