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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6. 정기심포지움 <만세후의 시대 : 3.1운동 이후의 융화와 불화> 후기 / 주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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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12-16 조회수 : 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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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2019년도 정기심포지엄

 

만세후의 시대-31운동 이후의 융화불화감상

 

 

주미애(성균관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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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는 일제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저항과 동시에 조선과 조선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정치적이자 사회적 운동이었던 31운동에 관한 논의를 운동 이후의 시대 즉, ‘만세후의 시대라 명명하며 만세가 열어낸 시대를 다각도로 고찰하기 위한 장으로서 이번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7명의 발표를 1, 2부로 나눠 진행된 심포지엄은 융화불화를 넘나드는 토론과정 역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다. 각 발표 및 토론은 다음과 같다.

 

 

1. 전영욱1920년대 조선통치론의 전개와 제령(制令)의 역할이라는 주제를 통해 내지연장주의에서 생기는 딜레마의 조선적처리 및 봉합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권한을 핵심 쟁점으로 보고 총독의 권한 상징이자 실체로서 존재했던 제령이 가진 역할과 추이를 살펴보는 방식과 대만과의 비교를 통해 주장을 이끌어나갔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일차적으로 총독부의 입안이 법제국에서 한 번에 통과된 사례가 별로 없었음을 거론하며, 당시 조선총독부의 권한과 법제국과의 위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것을 언급했다. 이는 발표문에서 제시한 680여 건의 조항 외에도 법제국에 의해 누락, 수정된 항목까지 포함하여 재고할 필요성으로도 이어졌다. 더불어 1920년대 나온 제령이 식민지 전 기간에 등장한 제령과 다른 가장 특징적 사항이 무엇인지 또 대만과의 비교가 1920년대 조선통치론의 전개나 제령의 역할 고찰에 있어 어떠한 영향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으며, 관련 대답은 후속연구를 통해 밝혀나갈 것을 목표했다.

 

2. 임이랑1920년대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개편과 의미31운동 이후 실시된 소위 문화통치는 교육정책의 전환과 추진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바, ‘내지연장주의문화통치를 내세우는 시점에서 시행된 교육정책의 성격 파악을 위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기구적 특질 분석 및 고적조사과종교과 설치 등 학무국 개편의 의미를 되짚고자 했다. 당시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교육개혁을 추진할 주체로서 학무국을 독립 승격시켰는데, 이렇게 격상된 학무국의 개편은 1920년대 제도 개정과 추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또 학무행정에도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서술했다. 이에 토론자는 특히 종교과 설치에 주목하면서도 기독교와 관련한 내용뿐만 아니라 신사향교제사 등으로의 확장된 어프로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라는 키워드로만 접근하면 선교사 문제로 관련되고 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 신궁 건립, 이왕직 재구성, 박람회, 경복궁 해체 등 대규모적으로 구상되던 교화사업의 프레임 안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학무국의 그 밖의 역할에 대한 간과를 우려한 것이다. 이어, 식민지 통치 전반기를 놓고 학무국에 포커스를 맞춰 생각해보자면, 사실 식민통치를 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학교행정이나 문교행정은 그 위상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닐 테지만, 피식민의 입장에서의 식민지 교육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고 또 직접적인 문제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러한 인식의 격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동반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더불어 학무행정이 식민지 통치에 있어 과잉 대표되는 경향에 대해서도 유의할 필요가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토론자의 이러한 의견에 대해 발표자 역시 동의하며 종교과에 대한 분석에 있어 기독교 외에도 불교, 신사, 향교와의 관련성이나 당시 총독부가 추진한 사업과 연결하여 신사, 향교 재편 사업 등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3. 이정선1910~1920년대 내선융화선전의 의미:일본인과 부락민조선인 융화의 비교에서는 본 심포지엄의 부제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내선융화를 논했다. 당시 융화란 일본 근대사에서 내선융화이전부터 활발히 사용된 용어로,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과 피차별 부락민 간에 요구되었던 것임을 설명했다. , ‘융화는 일본인과 조선인 관계뿐 아니라, 일반 일본인의 시각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공통된 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1920년대의 내선융화선전 내용을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재편이라는 관점에서 분석코자 했다. 이를 위해 일반 일본인이 융화되기를 요구받은 또 다른 존재인 부락민과 일본인과의 관계 비교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1920년대 융화는 일본 국민(신민) 내부의 인종(민족)적 차이와 계층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심화폭발하는 가운데 이를 무마하고 방지하기 위한 사상치안대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인의 변화를 촉구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었다. 해당 발표에 대해 토론자는 내선융화론을 일본 내 부락민융화론과 비교검토한 측면에는 의의를 두지만, 부락민융화와 내선융화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 일본 내부의 소수자를 융화시키는 것과 국가적 병합을 통해 흡수한 민족의 통합이라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를 융화라는 키워드와 논리로 양자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또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내선융화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므로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4. 이혜인1920년대 조선인 언론공간의 편성과 그 성격을 통해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조선인 언론공간을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다. 1920년대 이후 정치사상사의 주역들이 활동하고 주로 활용했던 것은 분명 언론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인 언론공간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배경과 성격은 어떠한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시사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라는 언론공간의 기획, 사고방식, 의도, 편성 배경, 성격 등이 가지는 의미를 들여다보았다. 발표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발표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또 다른 물음 즉, ‘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신문을 경영하려 했는가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판권의 전환이 퍽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신문사 경영에 참여하려 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말이다. 이를 위해 신문 자체를 언론이 아닌 사업적 측면에서 살펴볼 가능성과 필요성도 언급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우선 언급된 세 신문 외에도 시사평론을 계승한 민중신문까지 염두에 두면 네 가지 신문이 된다는 보충 설명과 더불어 조선어신문 발간의 배경과 조선인 언론공간의 성격으로서 발표자가 언급한 문명으로 총독부를 압박하려던 그들의 의도나 흐름의 폭에 유의하며 이를 보다 확대할 필요성에 대해 거론했다. 그 밖에도 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조선인에게 신문 또는 언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추가되기를 요청했다.

 

5. 최우석31운동 참가 학생들의 만세후31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빅데이터화 구축을 시도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운동 이후 그들의 행보를 추적조사하고자 했다. 그 연구 대상으로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 가운데 관립학교 계통을 중심으로 삼았다. 발표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확인한 자료를 통해 31운동에 참가한 학교 수와 학생 수를 제시하면서, 관립학교가 공립학교사립학교종교학교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참여율을 보이고 있음을 제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이는 학생집단 중에서도 가장 식민지 체제내화되어 있었던 관립학교 재학생들과 가장 불온한 집단이었던 학생단집단의 그 이후 행적을 상호교차해 볼 의도에서 선택된 작업이라고 했다. 토론자는 이에 대해 우선 학생을 하나의 주체로 분석할 수 있는지와 관립학교 학생들이 이 시기 학생집단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인지 아니면 31운동에 참여한 학생을 대표한다고 보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관립학교는 학력 구조 속에서도 최상층에 있었으며 그밖에 학력, 연령, 자산 등을 고려해도 일반 학생과의 특수성을 내재한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 참가자의 수적 비교에 있어서도 관립학교 vs 공립학교사립학교종교학교의 비교는 애초에 학교 규모나 수업 연한 등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이유를 들며, 이들 간의 비교가 적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31운동에 참여한 학생을 논하는 데 있어 경의 의전 등으로 대표되는 관립학교와 재학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특수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6. 이혜린 31운동 이후 한인의 상해 망명에 대한 프랑스 조계당국의 인식31운동 후 상해에 모여든 한인에 대한 프랑스 조계 당국의 인식에 대한 고찰로서, 1919년 임시정부 초기 시절 프랑스 조계 당국의 문서 활용을 통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는 당시 상해에 있었던 한인들을 무국적자처럼 취급했던 즉, 일본의 국적을 거부한 것을 바로 무국적자로 등치화시키는 기존의 논의에 대한 이견을 피력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프랑스 조계 당국이 상해의 한인들을 정치적 망명자라고 인식한 것은 만세가 열어 놓은 만세후의 시대의 한 모습이라고 설명하면서, 프랑스 조계 당국이 한인들을 망명자라 한 것은 허울뿐인 호명으로서 망명자로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 활동도 할 수 없는 허용된 범위 내에서의 보호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우선 프랑스어 자료의 해독능력을 높이 샀으며, 문서 안팎의 조계 당국과 한인의 상호관계를 밝힐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를 밝혀냄으로써 조계 내 복잡다단한 그들의 역학관계와 한인들의 실질적인 활동 양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7. 장원아 1920년대 초 평화론의 전개와 성격을 통해 이미 고전적인 질문이 되어 버린 ‘31운동평화그리고 폭력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발판삼아, 31운동 이후 국제정세 변화의 배경으로 다양하게 등장한 평화담론에 대해 논했다. 31운동 직후부터 파리평화회의와 워싱턴회의 시기를 중심으로 평화에 대한 언설을 당대 언론 중심으로 분석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는 1920년대 문화정치의 지형에서 평화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핵심 주제로 파악하면서, 당시 평화론의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질문했다. , ‘평화론또한 세계를 개조할 하나의 사상으로 소개되는 듯하지만, 평화론이 식민지 조선의 논단에서 유의미하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보태어 당대 언론에 등장했던 평화라는 용어는 사실상 담론으로서의 효과를 발휘했다기보다 수사적 표현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했다. 또한, 앞선 학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개념과 호칭에 대한 정교한 분석 및 설명이 보충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백인에 대항하는 동양평화, 31운동의 평화, 세계 인류를 위한 평화, (아일랜드, 인도 등의) 표제로서의 평화 등 각각 그 갈래를 달리하듯, 괄호 개념에 대한 염두와 천착된 용어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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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다양한 발표 이후, ‘만세후의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종합토론 시간이 이어졌다. 각 발표 때마다 등장했던 공통의 질문들이 종합토론에서도 일정 부분 이어졌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만세후의 시대는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만세후의 시대라는 너른 시공간을 내건 타이틀과 달리 대부분 ‘1920년대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만세후의 시대에 대한 고찰은 만세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아우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주로 1920년대로 치우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두 번째, 정확히 누구(무엇)와 융화하고 누구(무엇)와 불화했는가? 세 번째, 용어 및 대상에 대한 명명 방식과 해석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등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앞선 토론 시간에 다하지 못한 보충 답변을 비롯하여 만세후의 시대라는 심포지엄의 애초의 취지, 의의 그리고 향후 과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학무국을 통한 1920년대 교육 등을 바라본 연구자는 이 시대를 논하는 기존의 교육사 관련한 논의 방향이 대부분 동화 교육 내지 식민지 교육에 관한 담론으로 너무 과잉되어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31운동 이후 학무국의 위상 격하와 재편에 대해서도 그저 무의미한 일련의 과정 정도로 보기보다 31운동 전에는 통치 영역 밖으로 두었던 학무국을 통치 영역 안으로 포섭한 데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의미를 고찰코자 했다는 시도와 의의에 대해서도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과 설치 역시 정신적 영역정신 교화 부분이 총독부 영역 밖에 둔 것을 자장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 역시 중요한 지점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선교사 중심으로 바라본 연구에서 불교, 신사, 향교 등으로 확장 고찰할 것을 추후 연구과제로 남겼다.

이어, 일본인과 부락민조선인 융화의 비교 연구를 한 발표자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는데, 흔히 일제시기를 논하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차별……과 같이 민족을 당연한 전제로 두고 있는 현상과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이라는 식의 기존 방식을 뒤집고 싶었다고 했다. , 주어를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에 두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내에서 내선일체를 요구받는 일본인을 들여다봄으로써 절대적 융화나 결합이 조선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집어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내선일체내선융화에 대한 논의 역시 민족이라는 키워드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보니 모두가 당연스레 그렇게 생각해버리는현상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다양성이 배제된 일원론적 분석에 대한 회의랄까. 식민지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튼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시선을 가진 7명의 발표자가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하면서 시도하고자 했던 공통된 의도는 ‘31운동을 기념하는 기존의 방식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의 접근을 시도한 작업이었음이 (이에 대한 이견의견은 존재할지언정) ‘만세후의 시대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악마화된 문화통치, 기만적 통치술 등으로 짙게 드리워진 이분화된 어떤 을 깨보려는 고심의 흔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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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로서 31운동을 읽는 방식은 없는가요?”

이는 종합토론을 마칠 무렵 나온 질문이다. 질문자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어 운동의 학생 주체가 남성 위주로 되어 있다고 느꼈다. 여학생들이나 여성들에게 31운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물었다.

이에 보태어, 이번 정기심포지엄의 감상평 의뢰를 받고 필자가 사무국에 제일 먼저 문의한 것은 바로 토론문 표지 사진(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해당 사진은 일본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서 촬영한 31일 종로 보신각 맞은편 만세 사진이라고 일러주셨다) 하얀 바탕 위에 삼분된 컷의 두 컷이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만세후를 논할 때도, ‘31운동자체를 논함에 있어서도 여성은 부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아래 소개할 시민특강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3·1100주년과 3·8 세계여성의 날 111주년을 맞아 차별과 저항, 여자전(강조 인용자)이라는 시민특강 및 필드 투어가 올 초 32일부터 17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통영에서 개최되었다. 그중 2강과 7강의 주제는 불꽃 같은 삶,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왜 민족대표 33인에는 여성대표가 없는가였다. 그리고 이 특강 및 행사를 주최한 측에서는 나라 안팎에서 자주독립과 평화를 위해 묵묵히 행동했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통영지역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 고요했지만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현장 그 어디에서나 있었던 그들 여성들을 기억하고자 시민특강 및 인권평화 필드 투어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삶과 이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의 삶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인권·평등·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오마이뉴스, 2019227일 입력된 기사)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다. 애초에 여자전이라는 타이틀 말마따나 그녀들은 묵묵히 행동하지도 고요하지도않았다. 운동에 불을 지피고 불처럼 투신했으나, 31운동과 여성이 묶이면 늘 숭고하고 깨끗하며 효심(애정) 깊은 유관순들로서 상징 재현되고 마는 현상(現狀)에도 맞닿은 덜커덩거리는 설명이다.

 

침묵하지 않는 작은 개인들중에 뜨겁게 존재한 여성들은 생각보다많다. 권보드래의 31일의 밤에서 등장한 여성중에 <‘미친누이’, 칼 휘두른 백정 아낙들>에 소개된 스물네 살 김정희만 보아도 그렇다. “김정희는 과전리 장터의 만세 소문을 듣고 흥분토록 감격했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나 보다. 새벽 3시가 돼서야 독립기를 만들었다니 말이다. 옷감으로 사둔 흰 비단을 사용했다는데, 거기 한글과 한자를 섞어 대한독립만세를 써넣을 때 김정희는 피를 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나갔다. 집게손가락을 베었다고도 하고 잘랐다고도 한다. (중략) 그 후 아침을 치르고 정돈까지 하고 나왔을는지, 김정희가 체포된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다. 홀로 노상을 배회하며 피로 쓴 독립기를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다 체포됐다고 한다.”(권보드래, 위의 책, 396) 권보드래에 따르면, 19195월 재감(在監) 인원을 기준으로 할 때 31운동을 통해 체포기소된 여성은 총 212인이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당시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된 학생 신분의 경우 남학생이 337인에 여학생이 33이나되는 기록도 있다. 이들에 대한 분석과 추적은 어디에 있는가. 주지하듯,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흔히 전개 과정에서 소수자에게 빚지고도 최종적으로는 소수자에 등을 돌린다.’는 권보드래의 표현처럼 31운동기 여성은 표상으로서 그저 상징적인 유관순들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의 시도가 이번 심포지엄의 커다란 취지였다면, ‘만세혹은 만세후의 여성에 대한 접근에 있어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31운동의 여성들은 이후 넘어지고 실패하면서도 미개척의 길을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31일의 밤』에서의 그 말처럼 말이다.

 

 

 

* 필자 소개: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 중이며, <조선급만주>를 주요 매체 삼아 경성제대 재조일본인 교수의 중국현대문학의 수용에 관해 연구했다지금도 그 언저리에서 관련한 연구 중에 있으며번역작업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