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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17. 기획강좌 제2강 "[정치] '87년 체제', 자유화로 가는 막다른 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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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11-28 조회수 : 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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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에 있었던 역문연 기획강좌 제2강, "[정치] '87년 체제', 자유화로 가는 막다른 길"의 후기를 정해경 선생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강의해주신 전원배 선생님을 비롯하여, 참여해주신 분들과 후기를 보내주신 정해경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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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배선생님의 ‘87년 체제’, 자유화로 가는 막다른 길을 듣고 후기를 써보라는 말에 잠깐 망설였습니다. 그 분을 사석에서 몇 번 뵙고 강의 하신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강의하실까하는 기대를 갖고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이렇게 되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듣고 후기를 써야지 하는 마음에 강의 중간 메모를 하며 듣게 되었고, 질문도 생겨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강의 준비를 성실히 하고 책을 많이 읽고, 현 시국 조국사태라는 상황과의 연결고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갖고 준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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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87년 체제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설명하였다. ‘87년 체제는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어야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19876월부터 현재까지를 뭉뚱그려서 ‘87년 체제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느냐는 것이고, 그 은폐된 진실은 ‘87년 체제를 낳고 키워온 헤게모니의 본령은 아주 은밀한 연합이고, 그 계약서에 서명한 당사자는 30년 전의 군부와 민주화 세력라고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500년 장기지속의 비밀은 사대라는 하드웨어와 성리학이라는 소프트웨어가 환상의 궁합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 계층인 양반들은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계급에게 조금의 명예와 교양도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가부장과 향약을 통해 백성을 서서히 목을 조여 민중의 피땀을 갉아 먹고, 모순을 해결할 공동체의 체력을 고갈시켜 버렸다. 그 연장선장에 있는 박정희가 최초로 국가적 차원에서 착취를 조직한 악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조선 이래 우리 역사에서는 산업혁명의 과정이 통째로 생략되었고, 압축 성장은 조립·가공으로 종자돈을 모았고, 이에 대해 박정희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변명하겠지만, 상인의 발상이 판을 치는 최악의 변곡점이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결국 이윤은 인건비에서 나온다는 여기던 그들의 해법은 공장 자동화와 비정규직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진보 진영에 물음을 던졌다. “왜 산업정책에 개입하려 하지 않은지?”, “왜 입구인 생산에는 눈을 감고 복지 같은 출구에만 열을 올리는지?”, “금산분리와 검찰개혁이 노동자의 내상을 치유할 수 있는지?”, “고용 없는 성장은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국제 분업질서의 이권만을 얻으려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하고 있다. “이러한 ‘87년 체제양극화로 막을 내리고 민주화약탈의 자유화로 이행한다면 그 역사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라고 묻고 있다.

 

“7월과 8월에는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투쟁을 벌이잖아요. 그동안 억눌려왔던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일시에 대폭발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민주화보다는 권익향상, 임금인상 쪽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지금까지 좀 의문이 남아요.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노동자대투쟁이라는 말을 안 써요. 그때가 오히려 민주화를 더 진전시킬 운동을 할 때인데. 노동과 임금 문제 같은 것으로 이슈를 전환하여 민주화를 주춤거리게 하는데 일조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고요. ··· 결과적으로 그해 12월에 대선에서 패해했고, 물론 양김의 분열에 큰 책임이 있겠지만, , 이게 우리 국민이 미숙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위의 글을 인용하면서 함세웅 신부로 표상되는 민주화의 주역들이 생산계급의 파트너 십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의 배제는 이명박 때가 아니라 ‘87년 체제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이 산업정책에 개입하지 않고, 국제 분업 질서에 종속된 산업구조에 대한 항의를 조직하는데 힘을 보태지 않은 이유는 무지와 태만의 소치가 아니라 그들의 민주화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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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사회민주화를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민주화과정을 교란하는 불청객으로 취급받았고, 급기야 일자리를 찾아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저는 그 말에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외당하면 노동자계급은 소외가 되는가요? 그렇게 되는 과정 즉 소외당했던 노동자들의 노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발표할 기회를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발표가 기대가 됩니다.

 

 

 

 

** 필자소개

시민역사 강좌를 열심히 듣다가(특히 역사문제연구소의 강의에 매료되어 열심히 찾아서 들었습니다.) 문득 현대사 특히 대구 10월항쟁을 연구하고자 대학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결국 한국전쟁시기 이천의 보도연맹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