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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12. 역사3단체 학술회의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후기 / 백승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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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7-31 조회수 : 3,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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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2일에 있었던 역사 3단체(역사문제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학연구소) 공동주최 학술회의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후기를 공유합니다. 

 

연구소의 백승덕 연구원께서 보내주셨답니다. 향후에도 역사 3단체의 활발한 학술교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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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후기

 

백승덕(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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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2일 역사3단체(역사문제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 주최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이란 학술대회가 열린 지가 넉 달이 지났다. 그간 후기를 쓰겠다고 해놓고 하루하루 미뤘다. 결국 너무 늦은 후기가 됐다. 변명하자면 시의성은 잃었지만 오히려 지금이 학술대회에 대해 이야기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센 바람처럼 몰아치다가 이젠 잠잠해졌다. 그 사이 역사전쟁은 임시정부 법통이냐 건국절이냐 양자택일하라고 몰아붙이는 식이 아니라 한일 간 무역전쟁에 관심이 온통 쏠린 양상으로 변했다. 일본 수상 아베는 전쟁이 가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서고 한국의 청와대 인사는 애국이냐 이적이냐선택을 요구한다. 목소리들은 점차 더 날이 서는데 정작 강제징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기가 어렵다. 전쟁에 동원해서 강제노동을 시킨 것이 문제라면 전쟁에 대한 성찰과 감시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20년간 무기 수출이 10배 증가했다. 또한 이주노동자에게 강제노동을 요구하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지 않아 국제노동기구 협약에 반하는 국가로 남아 있다. 전쟁이 낳은 피해를 두고 갈등이 생겼다는 점에서 전쟁의 북소리만 커지는 상황이 부조리하다. 하지만 애국이냐 이적이냐묻는 목소리에 날이 서있으니 무슨 말을 보태기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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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법통론과 건국절 제정을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명시된 현실에서 임정법통론을 비판하면 반헌법세력으로 공격당하기 십상이다. 반면 건국절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비판하면 좌파라고 비난 받을 위험이 있다. 학술대회 다음날 ‘100주년 행사 다음날 臨政 정통성 비판한 좌파 역사학계란 제목으로 보도한 <조선일보>가 이러한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학술대회 당일에 역사문제연구소 5층 강당이 가득 찰 정도로 참가자들이 이례적으로 많았던 것과 달리 언론보도가 별로 없었는데 <조선일보>만 관련기사를 연달아 냈다. 이 신문은 제목에 좌파 역사학계라는 꼬리표를 반드시 붙였다. 학술대회 발표문 중에는 역사학계가 자신들의 학문적 엄밀성을 너무 내세우면 사람들이 역사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무서워질 위험이 있다는 자기성찰도 있었지만 <조선일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공격성을 마음껏 표출했다.

 

다행히(?) 지금은 흉포한 관심이 한일 간 무역전쟁으로 쏠려간 상태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낮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기는 때는 하이에나들이 피냄새를 맡고서 몰려가고 난 뒤다. 이제야 역사전쟁에 대한 학술대회의 후기를 써볼 용기가 조금 난다.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은 네 가지 발표로 이뤄졌다. 먼저 성신여대 홍석률 교수가 ‘‘역사전쟁을 성찰하며란 제목으로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어떻게 협소해지고 단순해졌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했다. 홍 교수는 한국에서 역사교과서가 일종의 국가의 정사(正史)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교과서의 특권적 위치를 상대화하고 국가가 덜 개입하는 방식으로 발행하는 것이 추세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같은 국가에선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역사해석에 대한 철학을 두고서 주로 보수 정치사회집단역사학계 및 역사교육계의 구도로 벌어지는 반면에 한국에선 교과서의 자구 하나하나를 두고 논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전쟁이 정부가 교과서 발행에 과격하게 개입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전근대적 정사 관념이 교과서에 대한 인식에 투영된 것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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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표는 역사학연구소 임종명 소장이 근대 기원·계보의 정치와 정통론이라는 제목으로 전통 시대의 정통론과 근대 정통론이 얽히는 계보에 대해 다뤘다. 임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서 국가정통론은 두 번의 국면을 통해 지층을 만들어왔다. 첫 번째는 19세기 말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이고 두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 시기다.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이처럼 근대적 이행과 탈식민화 과제를 이어가면서 정치화와 탈역사화해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당대의 정통성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정통성 바깥의 다면적/다층적 과거들을 역사 바깥으로 배제했다.

 

세 번째 발표는 역사문제연구소 이용기 소장이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민국 민족주의’’라는 제목으로 87년 이후 국가정통론으로 임정법통론이 수용되게 된 과정에 대해서 다뤘다. 그는 과거 임정법통론을 비판했던 진보역사학계가 오늘날 건국절 논쟁에서는 방관하거나 1919년 건국설에 동조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역사전쟁이 강화한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갇혀서 뉴라이트의 건국절 제정 주장을 막는 데에만 힘을 쓴 나머지 임정법통론으로 쏠려버렸다는 것이다. 임정법통론은 전체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이자 민족주권을 계승하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임정법통론의 논리가 임시정부의 역량과 대표성을 과도하게 부풀렸으며 분단상황에서 체제대결만을 부추기는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발표는 남한중심적인 대한민국 민족주의와 과거 민중사의 민중/통일 민족주의모두를 지양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마지막 발표는 연세대 이기훈 교수가 건국절 논쟁의 역사적 함의라는 주제로 건국절 논쟁의 전개과정과 건국절 제정을 주장하는 측의 논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 다뤘다. 그에 따르면 건국절 제정 주장은 1995<조선일보>가 이승만을 조명하는 연재기사를 실으면서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2000년대 중반부터 뉴라이트 운동에 의해 힘을 받으며 거세졌다. 하지만 건국절을 기념하는 사례를 해외에선 정작 찾을 수 없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건국절과 다르며 프랑스의 혁명기념일도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날을 상징적으로 기념한다. 그는 국가를 만든다는 것이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나가야 할 끝없는 과제라는 점에서 건국절 제정 주장이나 임정법통론 모두 문제있는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발표들은 국가정통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 접근법을 보면 국가정통론은 시대착오다임정법통론은 정통이 아니다란 입장이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 국가정통론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고 정통론이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 후자는 임정법통론이 남한 단독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반쪽짜리 현실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토론자로 나선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의 질문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입장이 부딪히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는 현 정부의 임정법통론 비판과 관련해서 국가 일반의 정통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남한 단독정부 정통론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쪽짜리 민족주의가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주의라면 그것은 국가정통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 홍석률, 임종명 등의 발표자들은 정사론과 정통론이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해서 역사적 진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학문적 엄밀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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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관점의 차이는 이용기와 임경석 간의 토론에서도 다시 한 번 가시화됐다. 임경석은 이용기가 민중/통일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시대착오라고 말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민중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자 한다고 반박했다. 임경석의 관점에 선다면 국가정통론은 그 자체로 문제라기보다는 남북한을 모두 아우르지 못하는 반쪽짜리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현 정부가 임정법통론을 내세워서 밀어붙였던 국가정통론이 과연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반쪽짜리 정통이기 때문에 불완전함을 비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후 과제로 남아있다.

 

한편으론 이날 발표들은 학자와 관료 등 정책엘리트들의 논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정통론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발표자들 중에는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역사주체들의 존재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작 발표는 엘리트들의 인식과 행위에 집중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서강대 정일영 교수가 토론과정에서 지적한 이 말은 추후에 국가정통론에 대해서 고민을 이어갈 때 염두에 둬야 할 문제를 보여준다. “왜 대중이 현 정부의 역사 드라이브를 지지하고, 기꺼이 역사전쟁에 참전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자칫 대안 없이 비판만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질문은 대중들이 임정법통론에 어떤 기대를 보이는지를 이해할 때 과잉정치화를 우려하는 연구자의 소극성을 넘어서 역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정치성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라고 이해한다.

 

국가정통론의 함정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헌법 전문을 간단히 삭제해서 정통론에 대한 언급을 지우는 길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온전한 정통론을 담는 길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헌법 전문에 대한 논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사회의 성격에 대한 입장이 첨예하게 나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 테다. 논쟁을 단번에 끝낼 수 없다면 헌법 전문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내보이는 것이 논쟁을 생산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2004<황해문화> 겨울호에서 미래지향적인 헌법 전문 다시쓰기라는 기획으로 여러 지식인들이 쓴 헌법 전문을 게재했던 것은 참고할 만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소설가 복거일이 간소화한 다음과 같은 헌법 전문()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 대한민국 인민들은 우리 삶을 인도할 원리들과 규칙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 헌법을 제정한다.” 복거일이 제안하듯이 전문을 최소화하는 것은 역사전쟁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어떤 길이든 현재로선 새로운 마그나카르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더 많은 제안들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