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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27. 봄답사 후기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명륜동 혜화동 답사> /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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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5-09 조회수 : 5,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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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토요일에 진행된 역사문제연구소 봄 답사 "명륜동과 혜화동을 걷다"의 후기입니다.

후기를 작성해 주신 이수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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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명륜동 혜화동 답사 후기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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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명륜동에 살게 되었나. 

이곳이 아니면 안되는 필연적인 까닭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진저리가 날 만큼 지쳐있다가 마음이 편해지는 곳에 내키는대로 짐을 풀었는데 그곳이 하필 명륜동이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 다만 이곳은 바람이 드세고 모진 날에도 왠지 아늑하고 온화했고, 고불고불 이어졌다 끊기는 골목길과 아담한 옛집들 사이를 걷노라면 상자에 몸을 말아 넣은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엄마 치마폭에 포옥 싸여있는 기분이 들어.”

왜 이 동네가 좋냐고 묻는 친구에게 했던 말이다. 이번 답사에 따라나선 것도 단순히 동네를 좋아해서다. 동네. 명륜동과 혜화동을 부르기에 더없이 적당한 단어다.

 

4월 27일 토요일 오후 두 시. 햇살만으로도 눈부신데 꽃과 신록이 화사함을 더했다. 

답사명칭은 “해방전후 잊혀진 흔적과 기억을 찾아서, 명륜동과 혜화동을 걷다”였다. 우리 동네가 해방전후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나보다. 어디로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는 이 동네의 골목길에 들어설 때처럼 이 긴 이름의 답사에 합류하는 것이 기대도 되고 조심스럽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에서 출발. 더러는 한옥도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현대식 건물들. 이곳은 유적으로 보존된 곳이 아니라 21세기 서울라이트들이 왕성하게 생활하고 있는 삶의 터전이니까. 해방 전후의 흔적을 이야기하려면 ‘옛날에 이러저러한 것이 있었다더라’ 하고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 실제로 배경식 부소장님은 성대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설명을 많이 하셔야 했다. 설명 중에 익숙하거나 생소한 이름들이 많이 나왔다. 조봉암, 장면, 노무현, 이병철, 여운형, 김구, 임화 같은 이름은 알 것 같았고, 정무묵, 김해균, 김상협, 성유경 같은 이름은 생소했다. 그들이 수없이 오갔을 거리를 내가 다시 밟으니 생전의 이야기가 더 와닿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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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이곳과 인연이 있었다. 그들은 해방과 분단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에서 정치 및 문화 엘리트로 활약했다. 부소장님이 답사 첫머리에 ‘터’ 이야기로 말문을 열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백악산과 응봉이 보이는 동네 터가 남다른가? 지리의 풍수와 음양오행의 조화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시작은 성균관이었던 게 분명하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은 성균관의 명륜당이 위치한 지역이 일제 강점기에 명륜동으로 명명되었다. 답사에서 들었던 설명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성균관 때문에 꽤 활발한 상권을 형성했던 것 같다. 성균관 수학을 했을 정도면 꽤나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들이 이 동네에 살았을 것이고,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몇 갑절로 있었을 터. 마침 근방의 대명길 표지석 내용도 생각난다. 대명길이 성균관 유생들의 유흥가였다는 것. 따지고 보면 대학로는 수백년간 대학로였던 것이다.

 

왕조의 몰락은 성균관의 몰락이었다. 근대적 통치 시스템에서 주자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사대문 안에서 공터로 보존된 국유지는 근대적 시설들로 채우기 좋았던 것. 일제는 이 일대에 각종 전문학교와 경성제대, 경성의전, 경성제대병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같은 것을 세웠고, 조선인들은 불교와 가톨릭 계열의 근대식 학교들을 설립했다.  

 

동네에는 최신식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모여살 수밖에 없었다. 이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것을 동경하고 갈망했을 것이다. 이 동네 백정들이 신분제의 철폐 후 육류가공업에 따른 수익으로 축재한 후, 성금을 모아 근대식 학교를 설립했던 건 당연한 흐름으로 보였다. 가장 귀한 유생들에게 고기를 대던 가장 천한 백정들의 학교가 혜화초등학교라 했다. 얼마나 간절한 꿈이었을까. 백정들이 꿈꿀 수 있는 세상. 세상은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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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만큼, 해방 전후 엘리트들은 분열과 반목으로 들끓었다. 다양한 엘리트들의 집합촌 같았던 명륜동 혜화동도 잠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갈등의 비등점을 표징하는 사건이 여운형의 암살 아닐까.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고 했다. 수령이 꽤 오랜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줄지어 있고, 겨울이면 군고구마를 파는 손수레가 자리했던 곳이다. 혜화초등학교 뒤편에 살던 친구 집을 가며 지났던 곳이고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 갈 때 지났던 곳이다. 

여운형 암살 당시의 현장 사진에는 플라타너스와 우체국이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앵두나무 숲이 우거진 혜화동에서 실개천을 끼고 비포장길을 따라 내려와 창경궁 방향으로 천천히 우회전을 했다는 정무묵의 세단은, 동네사람 모두가 여운형이 타는 차라는 걸 알 정도로 유일했고 유명했고 수월하게 표적이 됐다고 한다. 마침 전차가 다녔다는 로터리의 큰길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차가 2019년의 신호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었다.

 

시대를 이끄는 사상가 예술가 학자 정치가들이 이 동네에 들락였고, 들락이는 터에는 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재력가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저마다 꿈꾸는 세상이 있었고 그걸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했다. 분단이 확정되고 남북에 각 하나씩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 동네 엘리트들은 남북한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분단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해방 전후 한국, 서울, 명륜동과 혜화동에서 변화를 꿈꾸던 이들에게는 두 개의 정부도 너무 적었던 것 같다. 둘만 남기기 위해 죽고 죽이는 참극이 한동안 계속 되었으니 말이다. 과격하게 하나로 만들어 버리려던 6.25까지 떠올리면 꿈꾸는 이들로 격동하던 시대의 혼돈에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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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74년.

과거의 대저택은 빌라가 되었고 경성제대병원 의사들의 사택은 풀옵션 원룸이 되었고 시인들 지도자들을 길러낸 보성보고는 올림픽을 기념하는 체육관이 되었다. 개천이 흐르던 자리는 복개되어 도로가 되어 있고, 앵두나무 많았다던 언덕에는 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혜화동이 힙하던 시절에 이 동네 살던 부자들은, 강남이 뜨면서 그대로 다 강남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서울대병원과 성균관대학교를 비롯한 대학교들이 이곳에 남아있지만 지금 이 동네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전부 설명해줄 수는 없다.

 

지금 명륜동 혜화동은, 이후 명륜동 혜화동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도로도 골목도 커다란 건물자리도 바뀌지 않을 테지만, 이 ‘터’의 에너지는 시대마다 바뀌어 갈 것이다. 마치 혜화문 옛자리에 남아있는 성벽에 여러 시대의 축성술이 혼재하는 것처럼.

 

나는 다만 하나의 축석으로서 이 시대의 명륜동과 혜화동을 기억하고 증언해야겠다. 어느날 멀리 떠나게 될 때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혜화동 골목길에서 만나자고 해야지. 물론 <혜화동>을 같이 들을 것이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끼고.

 

 

<사진 : 역사문제연구소 2019 봄답사 웹자보, 답사 진행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