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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과 일본 아시아민중사연구회의 안산 답사기 (임동현, 나카지마 히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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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0-18 조회수 :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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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08:52 역문연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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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출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http://sewolho416.org/3910)입니다.

저자 의도와 별개로 블로그 편집자가 가져왔음을 알려드립니다.



 

  

세월호 사건의 고통을 함께한 안산 방문기

 

고려대 임동현

 

 

  2월 9일 아시아민중사연구회와 함께하는 학술대회의 마지막 일정으로 안산답사를 떠났다. 안산시는 일제시기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안산, 시흥, 과천군이 합처져 시흥군이 되었다. 현재의 안산지역은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으로 편제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은 반월이었다. 하지만 반월공업도시 기공식에 참여했던 국회의원 오학진(吳學鎭)이 반월이라는 명칭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반월이라는 명칭이 일제가 임의로 만든 명칭이고, 역사와 유래가 있는 안산으로 명칭을 바꾸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결국 수차례의 청원 결과 정부에서는 1986년 반월지구의 명칭을 안산시로 바꾸었다.

 

  공업도시로 성장한 안산시는 1988년 현재 인구의 85.5%가 40세미만으로 구성된 젊은 노동자 도시였다. 1990년대 말부터는 아시아 각국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2011년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인구비중이 전체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외국인이 많은 도시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아파트와 전철 노선 건설로 젊은 연령의 중간 소득 계층 가구의 이주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안산으로 답사를 간 이유는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안산의 도시적 특징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적다. 하지만 재난사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상층계층보다는 노동자를 포함한 하층계급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이 노동자의 도시 안산시민들에게 벌어진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아파서 찾아간 병원 로비 티비에서 속보로 세월호 사건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티비 속 배는 1/3정도 기울어진 상황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당시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티비에 영상이 나온다는 것은 주변에 이미 구조대가 출동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스의 어조도 심각하지 않았다. 여타 있는 해난사고처럼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 뉴스 속보로 배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잊지 못할 4월 16일이 시작되었다. 급격히 감소하는 구조자의 수, 증가하는 실종자의 수, 아니 아예 파악되지 조차 못하는 피해자의 숫자들. 사건이 일어난지 몇시간이 지났지만 정확한 상황파악 조차 하지못한 체 이루어지는 정부조치들.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 학생들의 면전에 폭력적으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 보험료를 계산하는 언론. 사건이 일어난 팽목항에서 사진 찍고 인증하기 바빴던 정치인들. 그렇게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304명이라는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면서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새 안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첫 목적지는 416기억저장소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3곳의 단체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기록을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기록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세월호 추모기록 자원봉사단이었다. 이 세 단체가 합쳐지면서 현재의 416기억저장소가 탄생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7월부터 피해자 가족들은 기억투쟁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하늘로 간 수학여행, 아이들 휴대폰 미공개영상 공개, 416TV 제작 등이 그것이었다. 현재 416기억저장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은 1000여박스이다. 현재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이 기록물을 영구보존할 것인가와 어떻게 각종 학계에 제공할것인가하는 문제라고 했다.

 

  416기억저장소는 기억국, 교육문화국, 공동체사업국으로 구성되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억국은 기록물 수집 관리를, 교육문화국은 시민소통, 전시, 예술활동 등을 맡아서 하고 있으며, 공동체사업국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416기억저장소가 위치해있는 고잔동에만 81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많은 가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잊고자 마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런 분들이 함께 마을에서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1호관은 사무실 겸 사랑방으로, 2호관은 현재 건설 중인데 40여평의 공간으로 304명의 기록물을 배치해서 전시와 교육을 담당하려고 하고 있다. 3호관은 문화예술전당으로 기획하고 있고 예술가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4호관은 서고인데 모아진 기록물들로 채우려고 하고 있다. 완성시점은 3년을 예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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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님의 설명이 끝나고, 간단한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현재 수집하고 있는 자료는 크게 3부류인데, 첫 번째가 진실과 정의에 관한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정부가 가진 자료를 비롯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공적인 자료들이다. 자료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 넘기고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가족, 시민들의 흔적에 관한 자료이다. 그 대표적인 자료로 진도체육관, 청운동, 광화문 등지에서 투쟁할 때 사용하셨던 이불을 말씀해주셨다. 이불은 단순한 침구류가 아니었다. 그 이불속에서 삭혀야했던 슬픔, 고통, 피눈물, 그리고 분노. 길고 길었던 투쟁의 과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해주셨다. 마지막은 희생당한 학생들의 기록이다. 학생들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4인1조로 집집마다 방문해서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를 우리에게 공개해주셨다. 평범한 여고생의 물건들. 교과서, 노트, 교복. 특색 하나 없는 일반적인 여고생의 물건들이었다. 이 평범성이 오히려 이 참사의 고통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 이 사업은 길게 10년 정도,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416기억저장소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국가가 아닌 시민의 힘으로 운영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민간기록보관소로써 가지는 의미가 매우 크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운영에 피해자 가족분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세월호 사건에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진상규명의 목소리도, 사건의 기록보관조차 모두 피해자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놀랄뿐이었다.

 

  같이 오신 아시아민중연구회 선생님께서 일본의 동북대지진을 이야기하시면서 일본의 대지진 피해자들과 세월호 피해자들과의 교류나 연대를 생각하고 계신지 질문을 하셨다. 사무국장님께서도 일본과의 교류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렸다. 국제적인 연대는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적 맥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동일한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연대가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416기억저장소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단원고로 향했다. 단원고는 그렇게 큰 학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작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는 생존자 가족 대표분을 만났다. 세월호 사건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는 총75명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아이들은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극심한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생존자 가족 대표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를 신기하듯이 바라보는 여고생들이 지나갔다. 단원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 학생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였을까? 불청객. 고마운 위로객, 아니면 그저 아무도 아니였을까.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은 2학년들이었다. 2학년 교실은 3층부터 2층에 걸쳐있었다. 3층부터 1반이 시작되는 구조였다.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가 1반교실로 들어갔다. 1반은 침수가 가장 먼저 시작된 반으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은 학생들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편에 있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도 모른체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만 믿고 방안에서 대기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0반에서 살아남은 학생은 단 1명이라고 했다.

 

  교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복도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과 자보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을 느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 감정은 눈물이 되어 흘러넘쳤다. 점심의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교실 안에는 많은 꽃과 작은 화분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요즘 유행하는 과자, 학생들이 생전에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 귀여운 인형과 장난감, 이쁜 액자에 담긴 학생들의 사진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실안은 매우 이뻤다. 그래서 더욱더 참혹했다. 뒷반으로 갈수록 교실안의 풍경은 점점 더 화사하고 아름다워졌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학생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어 책상위에 놓인 꽃과 포스트잇, 인형과 과자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교실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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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교실의 칠판에는 아이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글부터 시작해서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의 그리움이 가득한 글,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는 글들이 있었다. 칠판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그리움은 거대하게 나를 압도했다. 중간 중간 웃으면서 어서 돌아와 다시 놀자는 애써 밝게 써진 글귀, 남자아이들 특유의 허세가 가득한 욕설과 함께 얼른 돌아오라고 협박하는 말투의 글귀들, 칠판의 글들이 밝으면 밝을수록 글을 쓰고 있는 학생들의 눈물범벅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해맑은 글귀위에 번진 눈물 자국은 밝음 속에 숨겨진 슬픔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2학년 교실들은 말 그대로 4월 16일에 멈춰있었다. 각 반의 달력은 모두 4월달에 멈춰있었다. 4월 16일까지 X표로 채워지고 있던 급식표도 그날 이후로 멈춰있었다. 어느덧 1년이 다되어가면서 우리들은 우리도 모르게 세월호를 잊고 있었는데, 그 교실들은 여전히 4월 16일에 멈춰있었다. 죄책감이 너무 크게 가슴을 때렸다. 얼마나 울어야 이 슬픔이, 이 고통이 달래질지 모르겠다. 새삼 이러한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피해자 가족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30~40분정도 교실을 다 둘러보고 마지막 2학년 10반에 헌화를 하고 생존자 가족 대표분과 간단한 담화의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은 세월호 사건 당시 정부당국의 구조에 대한 태도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문제를 드러냈지만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존립 근거인 자국민 보호를 하지 못한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는 반드시 대한민국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75명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사무국장님과 생존자 가족 대표분 모두 살아남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꽃과 과자, 장난감들로 가득한 교실 중간 중간에 비어있던 책상들을 떠올렸다. 전후좌우 모든 친구들이 떠나버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그 비어있는 책상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공부하고 장난치고 놀던 친구들.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같이 생활하던 그 친구들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상실감,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 그리고 홀로 남은 공포. 이 모든 것이 살아남은 아이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다만 사무국장님께서는 그 아이들이 그 고통속에서도 잘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세월호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대로 시행이 되어야하고, 올바른 선체인양을 통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이 정확히 밝혀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원고를 나와서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분향소였다. 분향소에는 좌우로 컨테이너 박스들이 놓여져 있었다. 왼쪽에는 각 종교단체들의 사무실로 보였고, 오른쪽에는 유가족 대기실과 기록물을 보관하는 컨테이너 박스들이 있었다. 분향소안은 촬영이 금지였다. 안내원분들의 안내를 따라 영정사진 앞에서 우리들은 헌화를 하고,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묵념을 했다. 그리고 추도를 위해서 옆으로 이동해 한바퀴를 둘러보게 되었다. 이미 단원고에서 너무 큰 슬픔을 느껴서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영정사진들을 볼뿐이었다. 그러다가 영정사진 앞에 놓여있는 편지, 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비해서 많은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조심스럽게 놓여져있는 편지와 선물들은 조금 더 아이들을 알게 해주었다. 평상시 그 아이들이 꿈꿨던 직업들, 학교, 좋아했던 축구팀과 야구팀. 학교에서 달리 너무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분향소를 다 보고 나와서 유가족 대기실로 갔다. 유가족 대기실에는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유가족분들이 계셨다. 그날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선체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도보행진을 진행 중에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내려가 있어서 유가족 대기실에는 많은 분들이 계시지는 않았다. 우리와 간담회를 가지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희생자, 생존자 가족들의 아픔을 이야기해주셨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에게 몇가지 공통된 육체적 고통이 있는데 급속한 노화현상과 건망증, 가슴통증 그리고 잇몸질환이었다. 우리와 함께 담화를 나누셨던 유가족분께서도 이빨을 이미 십여개나 뽑은 상태였다고 말씀해주셨다. 사건 이후 식사를 하지 못하시고 계속 누워있었더니 약해진 잇몸탓에 이빨이 돌아가버렸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처럼 자식을 잃은 정신적 고통은 그대로 육체적 고통으로 전이되어버렸다. 그리고 피해자가족들의 요구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명을 지켜주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한다는 점도 강조하셨다. 마지막으로 다시는 세월호 피해자가족들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하셨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씀은 오늘 같이 와서 고통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처음에 안산을 간다고 할 때만해도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까,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단원고와 분향소에서 느낀 것은 고통이었다. 슬픔을 넘어 아픔이 느껴졌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느낀 고통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께서 느끼시는 고통의 백분일도 안될 것이다. 슬픔을 위로하거나 아픔을 달래주겠다는 마음은 이미 단원고 교실에서 사라져버렸다.

 

  슬픔을 위로하거나 아픔을 달래주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고통을 상대화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고통을 백분의 일이라고 같이 느끼고 공유했다. 세월호 사건이 얼마나 참혹한 사건이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된 것이다. 현재 단원고에 남아있는 교실은 얼마 안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416기억저장소와 세월호 피해자 가족분들은 그 교실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한지 찾고 계신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흔적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기록이 기억의 연장이나 말처럼, 우리는 점차 세월호 사건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분들에게 단원고를 방문하길 권해드리고 싶다. 그 길은 분명히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희생자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이 사건을 기억하고, 무엇보다 그 희생자 가족분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원고에 가서 그 고통과 슬픔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의 기록·추도·기억

― 한국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하고 

 

2015年2月17日 나카지마 히사토

 

 

 

  2014년 4월 16일, 인천발 제주도행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 부근에서 전복되어 침몰, 그 때문에 승객·선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 「세월호」의 전복·침몰에 대해 한국에서는 예상 밖에 발생한 불행한 일이라는 의미의 「사고」가 아니라 「사건」 혹은 「참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이야기되고 있다. 꽤나 예전부터 진행된 선박업의 규제완화·아웃소싱化는 선박개조나 적재량, 피난훈련 등, 모든 면에서의 안전관리를 무시하게 하여 「세월호」의 전복·침몰로 이어졌다. 또한 「세월호」 전복·침몰 당시 박 대통령 자신이 범한 초기대응의 지체와 이후 이루어진 구출작업의 혼란은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 상황을 증폭시킨 것은 각 매스컴의 보도로 정부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여 중대한 오보를 하거나 생존자 및 유족의 신경을 건드리는 보도를 행했다. 원래 「교통사고」였던 것이 「사건」 혹은 「참사」로 바뀐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은 생방송으로 세월호의 침몰을 직접 보고, 국가의 무능함과 개인의 무력함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국제학술회의 새로운 민중사연구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2015년 2월, 비매품)는 감각을 낳게 되었다.

 

 

  내가 소속한 아시아민중사연구회의 멤버는 국제학술회의의 일환으로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 멤버와 함께 2015년 2월 9일 「세월호」 참사로 다수의 고등학생 희생자가 나온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했다. 세월호의 승객·승무원 총수는 476명인데, 그 중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안산시의 단원고등학교(2학년생) 학생이 325명, 인솔교사가 14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참사로 고등학생 246명, 인솔교사 9명이 사망하고 고등학생 4명, 인솔교사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생존자는 고등학생 75명, 인솔교사 3명에 불과하다. 4분의 3이 희생된 것이다. 또한, 일반승객은 104명 중 71명, 선원 중에서는 23명 중 18명이 생존했다. 생존자 쪽이 많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조된 학생들에 의하면 배가 기운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잘못된 안내방송에 학생들은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많은 학생이 희생되었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고 지적되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세월호와 관계하여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가 운영하고 있는 「416기억저장소」, 단원고등학교,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이들 장소가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특히 「416기억저장소」와 단원고등학교는 똑같이 「고잔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같은 디자인의 다세대주택이 다수 건설되어 있었다. 안산시의 도시화는 1970년대 이후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단지 형성을 계기로 하고 있으며, 다세대주택 또한 그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이 주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은 지역의 젊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잃은 것에 대해 단순히 그들의 가족이나 반 친구들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 역시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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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등학교 주변의 다세대주택

 

 

 

  먼저 「416기억저장소」에 갔다. 이 「416기억저장소」는 상점 등이 입거하고 있는 2층 건물 안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사무소였다. 한편 이후 창고 등을 확보할 것이라고 한다. 벽 한 면에는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이상자가 쌓여 있었다. 전시 공간 쪽의 사진을 여기에 게재한다. 이 전시 공간에 장식되어 있는 그림도 희생자 중 한 사람으로서 화가를 목표로 했던 고등학생이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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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기억저장소

 

 

 

  이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와 관련된 민간 기록센터로 세월호 유족을 위한 공동체운동을 지향하고 있으며, 「정부주도의 공공기록과는 구별되어 시민 중심의 기록수집, 관리, 전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역사문제연구소·아시아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고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모으려는 기록은 3종류이다. 첫 번째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관련된 기록이다. 유족들은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요망(要望)에 일부 따른 형태로 작년 11월 7일 「4·16 세월호 참사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특별법이 제정되어도 세월호를 인양할 자세를 보이지 않는 등, 현 정권은 진상규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유족들은 시위를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 투쟁, 안산에서 참사현장인 진도까지 도보행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등을 행하고 있다. 두 번째는 유족이나 시민이 이 「참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 예로 「참사」 당시 가족대기소가 설치되어 거기에서 가족들이 숙박했을 때 사용한 담요를 들고 있다. 세 번째가 희생자들의 유품이다.

 

 

  종이상자를 몇 개 열어 유품을 보여주었다. 희생자들인 고등학생 자신이 찍힌 사진·스티커 사진 등도 있었는데,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의복 중심의 유품 사진을 여기에 게재해 둔다. 한편 뒤에 찍혀 있는 종이상자 하나하나에 고등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유품이 들어 있다고 한다. 유품 수집은 개개의 가족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는 작업이기에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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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고등학생의 유품

 

 

 

식사를 한 후, 걸어서 단원고등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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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등학교

 

 

 

  전술했듯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생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었다. 2학년생들은 10개의 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고등학생들은 기존의 교실에서는 도저히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다른 교실로 옮겼으며, 현재 사건 당시의 2학년 10개 교실이 「참사」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학년이 졸업할 때까지는 그대로 둔다고 한다. 즉 희생된 학생·교사의 책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10개의 교실은 희생된 학생·교사의 추도의 장이 되었다. 다음 사진을 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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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

 

 

 

  이 사진에서는 하나의 교실일 뿐이지만, 10개의 교실 모두가 이러한 정경인 것이다. 한 교실에 열 명이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1~2명밖에 살아남을 수 없었던 반도 있다고 한다. 희생된 학생·교사의 책상에는 꽃, 과자, 사진, 메시지 등이 많이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도 곧잘 교통사고나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아이의 사망현장에 꽃이나 과자 등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교실 전체가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이다. 더욱이 그런 교실이 10개나 있다.

 

 

  각각의 책상을 보면, 놓인 물건이 획일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꽃도 각각 다르다. 어느 곳에는 사진이 놓여 있고, 어느 곳에는 메시지가 있으며, 그림이 놓인 곳도 있고, 책이나 노트가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이것은 희생된 고등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성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희생된 고등학생들에게는 각각, 물론 부모도 있었고 클럽활동(部活)이나 학생회(委員会) 등에서 선배·후배도 있었을 것이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고등학생이 200명 이상 희생된 것이다.

 

 

  나는 한글을 전혀 읽을 수 없지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메시지의 내용을 들으니 다수가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쓴 것이라 했다.

 

 

  책상 위뿐만 아니라 칠판이나 다른 곳에도 추도라고 생각되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칠판 위에는 대한민국 국기가 걸려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세월호」 참사의 비극성을 전해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추도」의 장이라고 표현했지만, 희생된 고등학생들과 살아남은 고등학생·가족들 쌍방의 「진혼」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단원고등학교를 나와, 우리들은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 분이 어느 다세대주택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에도 학생 한 명(세월호 참사 희생자)이 살고 있었어요.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요. 여기에는 자식의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어디를 가든 자식이 떠올라요. 어떻게 이 도시에 있을 수 있겠어요?」

나는 화를 냈어요.

「당신이 이 마을을 떠나면, 누가 그를 기억하겠어요?」

우리들은 부모와 그의 친구들 30명이서 울면서, 웃으면서 그의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 마을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 분은 「여기서(안산시) 유족 분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의 목적 중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그 후, 큰 공원 안에 있는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도착했다. 여기는 정부의 「공식」적인 추도공간이다. 2014년 4월 29일 박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위로의 말을 걸었던 여성이 유족이 아니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물의를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이 분향소는 가설(假設)이기는 하지만 체육관정도 되는 공간이다. 내부 촬영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약 300명의 희생자 사진이 걸려 있고, 한 가운에 「분향장」이 있었다. 「416기록저장소」의 유품이나 단원고등학교 학생·교사 각각의 책상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확실히 살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는 이 참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알 수는 있었지만, 희생자 각각의 개성은 「집단」 속으로 매몰되어 버린 인상을 받았다. 합동분향소 근무자의 의례적인 대응도 맞물려 사적인 「기억」과 공적인 「추도」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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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하지만 이른바 정부의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안에서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전국 규모로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추구를 요구하는 서명을 모으고 있는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내부에서도 같은 서명을 받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합동분향소 영역 안에 조립식 사무소가 몇 군데 있고, 거기에서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정부 측과 대치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전술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이 조립식 사무소 안에 소장하고도 있었다. 이 사무소 안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의 활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바 「공적인 위령공간」을 점거하고 자주적인 활동의 장을 형성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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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분향소 안의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측 활동거점

 

 

 

  또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측은 이곳에 희생된 고등학생들의 어머니가 자수 등을 하며 치유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었다. 희생된 고등학생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배지를 받았기에 여기에 소개해 둔다. 「416」이라는 숫자와 「꽃」이 자수되어 있다. 이 배지도 「진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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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배지

 

 

  마지막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록의 승리자야말로 최후의 승리자」라고.

 

 

  안산시를 방문하고 단순히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만이 아닌 역사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다양한 감개(感慨)를 느꼈다.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때 국가나 매스컴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이 사실과정을 실증적으로 추구하고,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면서 그 후의 사회운영으로 연결해 가는 것은 실증주의적 역사연구의 과제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치의 과제이기도 하다. 정권이나 매스컴 측의 은폐공작 등을 배제하면서 가능한 한 기록에 근거해 실증적으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세월호 참사의 사실과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실증주의적 과학―학술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전술한 「기록의 승리자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이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증적, 객관적으로 사실과정을 분석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연구―정치의 과제는 다른 한편으로 희생된 고등학생들과 그들을 잃은, 살아남은 고등학생들, 가족들, 지역 사람들을 「진혼」한다는 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관계자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야기했다. 희생자를 추도하고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간다는 것은 희생자들을 「진혼」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희생자들의 소중한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러한 희생을 강제한 자들의 소행을 실증적으로 추급하는 동기를 고양시켜 가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한정하지 않고, 큰 역사적 사건 ― 8.15이든 3.11이든 상관없지만 ― 에는 희생자는 아니지만 그 일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직접적인 당사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각각의 개성은 본래 「집단」으로 회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족·친구·지역 등,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생 또한 존재하고 있다. 큰 역사적 사건을 사후적으로 서술할 때에 무시되는, 이 사람들, 이 민중들의 생각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과정을 실증적으로 추급하는 영위(營爲)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역사의식」 형성의 시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현대의 일본사회는 어떨까. 물론 이러한 의식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완전히 지워버리도록 일어난 일을 잊게 하여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2월 2일 전송한 인터넷기사 「【西論】 「“한중에 기대”하는 외교」의 어리석음…일본이 「가야할 길」은 신화로 배우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물에 흘려버리다」라는 일본인의 지혜도 여기(황천에서 귀환한 이자나기의 목욕재계―인용자 주)에서 태어났다. 재앙이나 원한에 단락을 짓고, 다시 태어난 듯한 청신(淸新)한 마음과 몸으로 새로운 세월을 맞이한다.

재생의 지혜는 일본인의 깨끗함을 낳았다. 좋은 예는 작년 온타케산(御嶽山)의 행방불명자 수색을 가을이 깊어가자 중단했을 때 가족의 대응일 것이다. 위령의 꽃다발을 바치며 봄에 마중하러 오겠다고 맹세하고, 경찰이나 소방, 자위대 등 수색대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하산했다. 숙박하고 있던 공공시설에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가족도 있었다.

이것이 이웃나라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사고에서 행방불명자의 수색 중지가 결정된 것이 약 7개월 후인 작년 11월. 행방불명자 9명의 가족은 항의하여 대기 장소인 체육관에서 계속 숙박했다. 그 고장에서 비워달라는 요구의 목소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怨)」의 국체(國柄) 그 자체의 반응이었다.

http://www.sankei.com/west/news/150129/wst1501290008-n1.html

 

 

  애초에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비교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되지만…. 여기에서의 문제는 슬픔, 추도, 진상규명, 책임의 소재, 이후의 과제 등, 「역사」 의식의 원류가 될 수 있을 것을 모두 「물에 흘려버리고」,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는 산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기기(記紀)라는 「신화적 역사」로 정당화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공공시설에 이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는 동조의식을 칭송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책임문제 ― 식민지, 전쟁,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 「이슬람」 인질살해 등 ― 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 대부분 모르는 것뿐이고 메모를 하지 않고 기억만으로 써서 사실오인 등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있다면 그때그때 정정해 가고자 한다.

 

* 희생자 등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유영(遺影)이나 메시지를 직접 찍은 사진의 게재는 피했다. 다만, 「진혼」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 글은 나카지마 히사토 선생님의 블로그 東京の 「現在」から 「歴史」 = 「過去」を読み解く ― Past and Present(https://tokyopastpresent.wordpress.com)에 실린 글로서 필자의 동의하에 전문을 번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