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강좌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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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7-12 조회수 : 5,8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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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2015 기획강좌
<유신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강의후기
강의 수강자 이은경
2015.07.01
나에게 1970년대란
1970년대는 이십대인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부모님 모두 60년대 생이라 개인적 연관이라곤 없었기에 ‘7,80년대’ 라는 근현대사 분류 속 한 시절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7,80년대는 유신, 박정희, 독재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의 단어가 연동된다. 그러던 중 경향신문의 토요판 기획에 한 면 가득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로 70년대 이야기를 보았다. 박정희와 선데이서울이라는 어딘가 어색한 조합은 나의 눈길을 끌었고, 그 기사 가운데 거리 한복판을 벗은 몸으로 달리는 스트리킹 이야기와 사진은 그 벗은 몸의 강렬함만큼 내게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기획 기사를 읽으며 70년대에 대해 고정되었던 내 생각들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유신, 박정희 등을 떠올렸을 때 그 단어들의 자리는 오로지 정치-여기서 정치라 함은 정치인에 쓰인 그 의미, 여의도 정치쯤 되겠다- 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고, 정치 이외에도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층위에서 유신은 자리 잡고 있었다. 강연을 진행했던 도서 <1970 박정희 모더니즘>의 저자들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강의를 통해 박정희에 대한 선/악,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에서 나아가 경제·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삶을 조명하고 현재의 그것까지 이어지는 연속선을 짚을 수 있었다.
70년대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한 <유신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강의의 가장 큰 매력은 1970년대 문학, 대중문화, 문화정치를 중심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우선 대중문화의 ‘대중’이 수용자인지 행위자인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에서부터 질문했다. 그 당시 대중 혹은 민중들은 유신이 주문했던 민족중흥과 계도의 대상에 머물렀던 것만이 아니라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최초의 전후세대로서 주체성을 갖고 있었다. 단적인 예가 세 번째 강의(김원)에서 등장한 ‘한국적인 것’ 만들기이다. 전통에 대한 태도를 부정에서 긍정적으로 전향한 후, 박정희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유신 정권이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입했던 것만이 아니라 지식인, 대중들도 이를 열망했고, 혹자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어 이를 수행했다. 영화를 예로 들면, 정부가 영화를 검열하기도 했지만 감독 스스로도 그 가치관을 내재화하고 자기 검열하곤 했다. 이는 검열, 억압 그리고 지배와 이에 대한 순종·종속이 기계적 도식관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어떤 요인들이 그들을 내재화하게 만든 것인지 강연해주신 선생님께 질문했지만 명확한 답변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식민지배 경험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민족적 자존감이란 달콤한 열매는 유신정권이 내미는 선악과였으리라 짐작해 보았다.
세 번째 강연 내용 중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특정한 시대의 흐름이 영웅을 호명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명량>의 주인공이자 박정희로 인해 호명된 영웅 중 하나인 이순신이 그 예시이다. 광화문 광장에도 우뚝 서있는 ‘성웅 이순신’이 만들어진 민족담론 속 우상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님은 덧붙여 ‘성웅 이순신’과 왕(국가,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오늘날 ‘불멸의 이순신’은 각기 다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셨다. 천만 관객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가까운 ‘명량의 이순신’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래도록 생각했다.
욕망을 디자인하다
경향신문 기획기사 제목에도 등장한 ‘선데이서울’은 두 번째 강의(김성환)에서 다뤄졌다. 선데이서울에는 당시 대중의 섹슈얼리티와 부富·돈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오락연예주간지이자 대중문화지로써 당시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고, 또 표현한 선데이서울의 역사를 들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직장인/대학생 등 일반인 여성을 표지모델로 내세우고 한편에는 비키니 화보, 호스티스 이야기를 담았던 것은 여성이 ‘낮에는 성녀, 밤에는 창녀’로 기능하길 바라는 남성의 욕망을 반영했다는 분석이 기억에 남는다. 7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윤락산업에 종사하는 타락한 여성이 ‘정상’적으로 변모하는 미담이 지면에 등장하곤 했다. 이를 통해 국가가 여성을 계도·계몽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돈에 관해서는 ‘맨주먹에서 억대까지’의 쇼킹한 미담과 부자시리즈를 실음으로써 대중의 욕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재벌이 되고픈 욕망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것은 곧 부질없고 허망한 것임이 드러났지만 맨주먹 신화, 샐러리맨 신화는 이후 90년대에도 등장한다. 선데이서울을 들여다보며 유신 정권이 행한 억압의 잔여물이자 통제되지 않는 대중들의 욕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욕망은 아파트, 중산층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유신정권은 중산층을 육성함으로써 통치를 지지하는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대중들은 도시의 중산층을 지망하고, 중산층에서 이탈되지 않으려 했다. 이촌향도, 노동 계급 형성, 자본주의 정착이란 사회현상을 추진한 기저에는 열망과 불안이라는 심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중산층, 여성을 주제로 한 1강 강연에서 여성잡지 <주부생활>에 드러난 여성들의 중산층 편입 욕망과 박완서 소설 속 ‘상경’의 경험, 아파트에 대한 감성 등을 함께 관찰했다. 여기서 형성된 중산층 문화는 근대화(모더니즘)와도 맞닿아 있었다.
모더니즘? 모더니즘!
도서 <1970박정희 모더니즘> 제목에서 모더니즘은 총체성과 본질을 거부하고 세상을 파편으로 인식하며, 미적 자기 반영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 사관으로써의 그것이 아니다. 박정희는 반동적 근대주의자로도 불리지만 박정희 시대의 모더니티는 직선, 팽창, 성장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 당시 대중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산업화, 개발에 동참했고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현재 박정희와 유신시절에 대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며 공과功過가 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학률로 표현할 수 있는 공부에 대한 열망, 사실 학생들이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졌다기보다는 부모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교육열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신분상승의 열망과 욕망은 경쟁을 당연시하고 학벌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전까지 고교 평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경쟁의 대중화와 공고한 학벌 위계를 가져온 측면에 대해서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에 대해 강의할 때 얘기하고 싶었으나 질문의 열기에 가로막혀 묵혀둔 질문이 있다. 강연 내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과거/전통에서 근대(혹은 현대)로 이어져 오면서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관계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의 가치관 전환이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마을과 가족을 중심으로 엮인 관계중심의 사회에서 익명의 개인이 흩뿌려진 군중(다중, 대중, 공중 등)이 모인 도시 국가(사회)로 거대한 전환을 했는데, 그 요인과 영향이 무엇일까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단순히 ‘이촌향도’로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이동하게 만들었는지, 농촌이 저가 곡물과 노동력을 도시에 제공한 착취의 대상이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여촌야도’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등의 질문이 잇달았다.
자유에 대한 앎, 자유로운 삶
“민주주의라 쓰고 자유주의라 읽는다”
마지막강연(황병주)에서 그동안의 강연을 갈무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그동안 무심코 흘려듣던 우리 사회의 정체성,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국가주의, 집단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까지 각종 ‘주의’들이 역사와 정치철학을 아우르며 등장했다. 유신은 민주주의를 전유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사실상 집단주의적 논리로 자유 민주주의를 전유한 것이다. 이는 ‘주권자의 결단’을 강조하며 동질성의 확보, 이질성의 섬멸을 주창하던 칼슈미트의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언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권운동 등의 기치를 내건 점을 근거로 민주주의라 쓰고 자유주의라 읽은 것이라 주장하셨다.
박정희 정권이 정의내렸던 자유는 곧 방종이고 서구적인 물질문명이었다. 국가주의적 미학에 따라 거리와 일상을 연출해냈고, 이는 기성, 보수층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하며 심지어 잘하기까지 한 가치와 관행이라는 지적이 흥미로웠다. 18년간 체제 존속이 가능했던 이유가 기성/보수층의 호응에 있으며 나아가 유신이 예외적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반자유주의적 유신과 반유신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자유주의’ 라는 구절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유주의는 각자도생, 각개약진 경쟁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정체성으로 갖고 있지만 ‘민주’는 반독재, 반유신 투쟁 등 안티테제의 도구로만 머무르고 있고, 자유주의만 2015년까지 만연해있다. 강의 이후 토론 시간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어 뜻 깊은 시간이었다.
식민지배와 전통으로부터 단절되고, 전쟁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고, 불균형 발전과 지역주의로 인해 동서가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이념과 사상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조부모, 부모 세대의 역사는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이 그토록 논쟁적이었던 이유를 되짚어 보게 된다. 정치와 경제, 문화, 사회는 칼로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들으며 정치가 우리 삶에, 대중이 정치에 쌍방향으로 영향을 주고 유동하는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는 잊고 미래로 향해가자는 그 분의 말씀이 그 화법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유다. 나 역시도 그동안 한 독재자로 인한 엄혹한 70년대를 마음속에서부터 단절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반성해볼 수 있었다. 시대를 묻고, 다시 보는 ‘천년의 상상’ 시리즈 <1960년을 묻다>, <1970 박정희 모더니즘>에 이어 1980년이 기대된다. 지식을 나누고 생각의 장을 마련해주신 역사문제연구소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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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문제연구소 2015년 기획 강좌 후기
성준근
우연한 기회에 역사문제연구소의 기획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다.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주제로 진행된 강좌였다. 강의에 앞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대, 경험이 아닌 역사로만 이해하는 시대, 그런 1970년대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매주 수요일 저녁 5주간 다섯 번의 강의를 들으며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을 나눠볼까 한다.
1980년대에 태어난 나에게 1970년대는 교과서 속 혹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암울한 느낌의 막연한 대상이었다. 키워드로 보면 유신, 독재, 긴급조치, 새마을운동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독재자, 통제된 사회, 자유를 억압당한 국민 등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던 1970년은 지난 2012년 12월 이후, 커다란 물음 하나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그 독재자의 딸이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당시 내가 가진 역사에 대한 이해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3년 차를 지나고 있는 오늘, 그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다섯 번의 강의는 내안에서 쏟아진 물음들에 속 시원하게 답을 해 주지는 못했지만, 강의마다 작은 실마리와 징검다리의 디딤돌을 하나쯤은 던져 주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강의 중 하나는 ‘선데이서울과 1970년대의 문화’를 주제로 한 김성환 선생님의 강의였다. 선정적 대중잡지의 대명사라는 소개말과 강의 중간 중간 자료화면을 통해 본 『선데이서울』은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당시의 시대상과는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좌를 수강했던 사람들 중 20~30대가 비교적 많았는데,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시며 내가 느낀 것과 같은 분위기를 인식하셨는지 잠깐의 고민 후 적절한 예를 들어주셨다. 요즘으로 치면 남성잡지 『MAXIM』과 같은 잡지라고. 그제야 아! 하고 퍼뜩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두 잡지를 읽는 환경도 조금은 비슷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사회적으로 억압된 시대였던 1970년대에 『선데이서울』이 있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통제되고 억압된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군대에서 군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잡지가 『MAXIM』이니 말이다.
이어지는 197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라디오와 TV가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사회 전체의 교양 수준이 향상 되었다. 그리고 개발과 경제발전의 결과가 축적되었고, 배움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광범위하게 발현되고 실현되기 시작했다. 특히 잡지는 글을 싣는 매체이면서 담론이 모여드는 사상의 저수지였다. 잡지는 신문에 비해 훨씬 폭넓고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는 텍스트의 보고였다. 잡지에는 한편으로 대중의 다양한 욕망이 혼재했다. 대중은 값싼 판타지를 소비하며 이를 통해 서로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위로를 얻기도 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의 탄압과 검열도 거스르지 못했다는 대중문화의 흐름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랬을까, 당시에 대중의 욕망이 컸다한들 독재정권의 통제와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사실 대중의 욕망이 권력의 통제를 넘어서서 그것을 극복 했다고 보기 보다는, 정권과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대중의 욕망을 적절히 활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TV와 라디오,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재벌’, ‘부자’라는 말을 통해 노골적으로 ‘돈’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겼다. 일부 방송사는 재벌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자본의 논리, 정부의 정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평범한 대중의 시선으로는 재벌의 비리나 국가경제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오로지 개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쏟게 되기 마련이다. 나아가 부가 시대의 미덕이 되고 그에 대한 열망이 인정받게 되자, 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결과로써 정당화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의 ‘재벌문제’로 이어졌고,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땅 투기, 고리대금, 착취 등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비결이 되었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싶어 입맛이 씁쓸해졌다.
‘유신의 모더니즘과 대중의 문제’를 주제로 한 천정환 선생님의 강의도 유익했다. 비록 강의를 통한 만남은 처음이었지만, 그의 저서 『자살론』을 흥미롭게 읽었고 페이스북을 통해 인연을 맺어 글을 종종 접해왔던 터라 다섯 명의 강연자 중 유일하게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강의 내용은 리얼리즘과의 대비를 통해 모더니즘을 설명하고 박정희 시대의 모더니티, 대중지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실 『자살론』이나 『1970 박정희 모더니즘』에서 다룬 바 있는 ‘유신 시대 한국사회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강의의 주제가 달라서 조금 아쉽긴 했다. 『자살론』을 보면서 나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사회적 죽음’ 즉 사회구조에 의한 자살로 이해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더 이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했을 때, 뜻을 담은 마지막 외침으로써 목숨을 던지는 노동자들의 자살은 적잖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외치며 쓰러졌던 22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 그랬고, 2000년대 이후로 넘어와서는 용산참사, 쌍용자동자 해고 사태가 그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회의 약자들이 죽음으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이 본격화 되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로 깊숙이 들어섰고, 효율성을 강조한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로 노동은 더욱 소외되고 배제되었다. 이는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낳았지만, 개인화되고 파편화 된 삶으로 인해 ‘죽음의 외침’은 이전과 달리 사회 속에서 힘을 잃었다. 그렇게 ‘인간다움’도 사회에서 사라져갔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중이 가진 정보와 지식의 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축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작동하는 ‘대중지성’에서 과연 긍정적인 방향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강의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역사문제연구소 황병주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의내용도 물론 훌륭했지만, 속사포 랩을 하는듯한 빠른 속도의 말을 따라가느라 더욱 집중할 수 있어서 그랬다. 말씀이 어찌나 빠른지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내셔서 저러다 숨이 넘어가서 큰일 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행스럽게 무사히 강의를 끝마치고, 마지막 강의 뒤풀이로 치맥(치킨&맥주)까지 함께 나누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5년에서 바라본 1970년대 정치와 경제’를 주제로 빠르게 쏟아내신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유신은 반유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반공주의가 공산주의의 부재가 아니라 거꾸로 선 공산주의인 것처럼, 반유신은 유신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존립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정치와 운동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의 성격이 짙었다. 특히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개인이 저항적 주체로 등장하게 된 것은 유신체제의 공이 크다. 유신의 반자유주의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한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던 셈이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기존의 이해가 아닌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의 구도로 1970년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새롭고 신선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이념이 갖는 원형으로서의 틀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변형하고 활용해서 시대에 맞게,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 맞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답을 찾는 노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오늘 이 순간의 삶을 깊이 돌아보게 된다.
다시, 강의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 본다. 과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오르는 일은 결국 오늘을 사는 지혜와 더 나은 내일을 살아내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2015년을 사는 나에게 1970년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 아버지가 땀 흘려 일궈낸 가정과 사회, 내 어머니가 정성껏 길러낸 시대의 자식들, 박정희부터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결코 한 사람의 리더십으로 치환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박정희 정권의 시작과 끝 그리고 성장에는 대중의 참여와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시대가 낳은 무한경쟁과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천정환 선생님의 강의 말미에 『씨알의 소리』 발행사를 들려주셨다. 큰 울림이 있어 계속 곱십어 보게 된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민중은 어리석으니까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제법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틀림없이 압박 착취하는 독재자가 하는 소리입니다. 정말 어진 지도자는 그런 소리 절대 안 합니다. 민중에게 들으려 합니다. 지혜는 결코 천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 씨알(민중)에서 나옵니다.” 함석헌, 『씨알의 소리』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발행일 1970년 4월 19일)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모든 역사적 과정은 파괴와 변형과 재건을 의미하며, 모든 쇠퇴 속에 진보의 씨앗도 있다고 보았다. 2015년의 대한민국을 보면, 항쟁과 피의 역사로 이뤄낸 민주주의가 자꾸 뒷걸음질 치는 것만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기번이 말한 ‘진보의 씨앗’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무력감만 켜켜이 쌓여가지만 씨알의 힘, 깨어있는 시민의 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오늘도 주어진 나의 몫을 묵묵히 살아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