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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꺼이 속박되기 ― 2018.4.30.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지식인」 토론회 후기 / 전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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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05-24 조회수 : 8,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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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꺼이 속박되기 

2018.4.30.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일본 지식인토론회 후기

 

전영욱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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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4월 30일 오후 6시,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에서 재일 역사학자 정영환 교수 초청 토론회가 열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지식인”

— 발표: 정영환(메이지학원대학 역사학 교수)

— 시간: 4월 30일(월) 저녁 6시

— 장소: 역사문제연구소 5층 관지헌 

— 사회: 신주백(연세대 교수, 한국사)

— 약정토론: 조경희(성공회대 교수, 사회학), 이신철(역사디자인연구소 소장, 한국사), 전영욱(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국사) 

 

 

 

1.

나는 토론에 임하기 전, 다음 두 글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날의 토론은 그 제목("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지식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두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을 동시에 엮은 후 정연한 말로 발화하는 일은 개인의 역량 이상의 일임을, 너무나 강하게 예감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사전 공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몇 종류의 독서는, 지금의 상황이 내 짐작보다 훨씬 뒤틀린 풍경 속에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일본에서 제기된 위안부소송의 원고 중 한 명인 송신도 할머니의 더러운 생명이라는 멋진 말이 있다. 자신은 더러운 생명이라 살아남았다고. ‘더러운 생명이란 살아남고자 하는 의사를 뜻한다. 생명에 대한 집착이나 가족을 향한 마음, 가혹한 생활 속에서의 작은 기쁨과 긍지, 그리고 일본 병사와의 사랑 등이 그 속에 있었다고 해서 대체 누가 비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에이전시의 행사 속에야말로 희생자가 된 이들의 생존전략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우리는 고난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희생자들에게 서바이버(생존자)’의 이름을 부여해 다시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할 것이다. (아사노 도요미 외243)


 

그녀 역시 중국의 위안소에 끌려간 당시, 몇 번이고 도망치려 하고, 저항해서 얻어맞고 캄캄한 방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러나 난 목숨 더러워(아까워)라고 말할 정도로 목숨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녀는 전쟁터의 위안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싫다고 하는 마음을 죽인 것이 아니었을까? 전쟁이 끝난 후, 한 일본 군인의 꼬임으로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일본에 도착하자 버림당한 그녀가 기차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그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마음까지 죽여가면서 지켜온 목숨을 전쟁이 끝난 후에 처음으로 스스로 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7년 동안 감금자인 일본 군인에 대한 의존심을 높여가며 군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 이국땅에서 마지막 감금자=군인을 잃은 충격은 죽을 만큼의 절망이었던 것이다. (손종업 외, 273-275

**강조는 모두 인용자. 서지사항은 글 마지막 부분 참고.

 

 

이를 같은 텍스트에 대한 다른 비평이라고 해 두자.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예의 그 책을 둘러싼 각자의 논점에서 꽤 일반적이다. 누군가는 그 책을 모리사키의 뒤를 이어받는 성실한 글쓰기”(아사노 도요미 외, 217)라고 평가하고 싶을지 몰라도 그 책이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이어받는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다. 또 다른 이는 그 책을 우먼리브의 진정한 계승으로 평가하면서 문옥주나 이학래의 사례가 보여주는 식민지의 모든 구성원이 강요당한”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을 직시하고 있다는 비평을 곁들이기도 한다(위의 책, 198~202). 모리사키 가즈에, 우먼리브, 문옥주, 이학래. 이 텍스트들이 지금까지 어떤 역사성을 담보하며 등장해 왔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박완서, 에드워드 사이드, 한나 아렌트, 도미야마 이치로, 레비나스, 서발턴, 프란츠 파농 심지어 예수와 십자가까지 활용되는 다양한 비평들을 목격하는 경험은 그저 가볍게 넘기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경험과 이를 의미화하려는 나름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연결된 매끈한 질문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는 지식인에 대한 평소의 믿음이 적잖게 작동했을 것이다. 토론의 주제는 분명 그 책을 둘러싸고 있는 지식사회의 풍경을 그려내는 일이었으므로 내가 한때 지니고 있던 생각을 재조정하는 일이 필요했다. 나는 그 책의 영향력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었고, 그래서 이 책을 날마다 생산되고 사라지는 논저들의 위치로 평준화시키면 될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몇몇 지식인들에 대한 신뢰가, 미간의 주름처럼 찌푸려지는 것을 순간 알아챘던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찌푸림의 원인을 보다 분명히 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다지 또렷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생산적인 대화의 새로운 출발점,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는 바람이 그 지식인들 일반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후 손쉽게 이어지는 자문은, 지금까지의 대화가 생산적이지 않았다는 자각의 계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책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기저는 어떻게 생겼을까 등등의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자답하기 위해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 풍경의 구석구석을 성심성의껏 돌아다녔다. 이미 일본의 전후戰後 체제를/가 만들어낸 불안과 기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들 덕에 대략 정리를 할 수 있었지만,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자문을 하게 한 지식인들이 리버럴임을 정말 간신히 알게 된 순간, 자답에 힌트를 줄 만한 몇 가지 현상들을 발견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현상은 아마 연구자와 활동가는 다른 존재”(0328집회실행위원회(0328集會實行委員會), 아사노 도요미(浅野豊美), 참가후의 감상(参加後感想))라는 확고한 언명에 드러나는, 학문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다른 비평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있을 필요가 없는 세계”(아사노 도요미 외, 305), “주체 없는 주체”(같은 책, 322)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주체에 대한 다른 비평일지 모른다.

 

다름은 일종의 가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다름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최소한 옛날보다는 주어와 서술어가 맞는 이유를 발견해야 했다. 이는 토론에 참여하는 의미로서 스스로에게 내준 숙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발표를 듣고 토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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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지식인> 토론회 장면>

 

 

2. 

정영환의 입국은 여러 측면에서 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섰던 조경희는 재일조선인을 어떻게든 체제 내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한일 간의 움직임과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든 화해로 끌고 가고 싶은 역사 수정주의가 상통하는 소용돌이 속정영환이 있다고 말했는데,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개인의 선택문제로 치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해석은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미 북한국적자를 소재로 잠재적potential 또는 잠자는dormant 국적 개념을 이론화하려는”(이철우, 2018.5.3 페이스북 게시물) 학술적 문제의식에 정영환의 사례가 가시화되었을 정도로 그는 현재의 중앙에 서 있다. 더불어 정영환 스스로가 “(재일조선인에게) ‘남이냐 북이냐를 넘어선 질문을 다시 해”(한겨레, 2018.5.8) 달라고 요구한 것은 이 사태가 역사적 현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이 토론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는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자신의 가설을 소개했다. 일본의 1980년대 이후, 전후민주주의 운동이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담론 구도가 있는데, 예의 그 책은 이 구도 속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가설. 그는 그 책이 제공하는 위안부이미지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스로가 이 주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로 그 책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발표 전반부에는 책에 대한 비판이 부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시점에,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이후 가시화된 전후체제 옹호라는 인식 틀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는 배운 사람들의 문제라고 한 것은 발표의 방점이 어디에 찍혔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 발표의 주제는 분명 지식인들이 속한 새로운 담론 구조를 역사화하는 데 있었다(전반부 내용에 대해서는 정영환, 2016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새로운 담론 구조를 분석하는 역사학자 정영환의 시도는 이런 말로 시작되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우경화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 자체를 못 찾고 있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리버럴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제시한 리버럴 개념 극단적이지 않은 규범을 느슨하게 공유하는 집단 정도의 의미”(정영환, 244) 이 불충분했다고 아쉬워했다. 왜냐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스스로를 리버럴, 즉 자유주의로 지칭하는 사례는 일본의 전후사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에서 자유주의는 원래 보수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언어였다는 정리 뒤에, “때문에 리버럴이라는 표현이 비판적인 담론을 총칭하는 말로 등장한 것 자체가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이 붙는 과정은 어떤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시절에 아사히신문사의 <<논좌論座>> 편집부가 출판한 <<리버럴로부터의 반격 아시아·야스쿠니·9リベラルからの反撃 アジア·靖国·9条>>의 한 구절이다.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한 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전후 일본 정부는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행동이 틀렸음을 인정하여 사죄함과 동시에 각국의 경제발전에 최대한 공헌하는 외교를 전개하였다. 그 결과 어떻게든 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관계를 재구축함과 동시에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자신의 발전, 즉 일본의 발전으로 이어왔다.

 

정영환은 이 구절을 “2006년 이후 리버럴이 주장하는 쟁점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쟁점을 기준으로 할 때 비로소 명확해진 대항 구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리버럴의 느슨함으로 뒷받침된다. “리버럴은 세력이나 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이 느슨함의 기원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전후정치사 이해가 뒤따라와야 했는데, 이는 느슨함의 기원이 전후 체제를 이해하는 방법 또는 태도의 차이와 매우 밀접하다는 점과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발표의 핵심 중에 하나였던, ‘전후 체제는 현실인가, 이념인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현실로서의 전후 체제를 옹호하는 것. 이것이 리버럴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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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지식인> 토론회 장면>

 

 

리버럴에게 일본 전후 체제가 현실이 되어야 했던 정치사적 맥락을 추적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쉽지 않았겠지만, 이를 한국에서의 강연 중에 전달하는 것은 그 이상의 한계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가 한국의 언론이 그 책을 매우 본질적으로비판하고 있다고 아쉬워한 맥락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사회현상 자체에는 상당한 함의가 있습니다.” 그 함의를 쫓아가기 위해 한국 지식사회와 일본 지식사회의 교류로 인해 형성된 담론, “특히 한국의 일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일 듯하다. 정영환의 제안은 아마 앞으로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낳을 것이다. 이미 토론자로 나왔던 이신철은 탈냉전 이후 새롭게 형성되는 제국 질서에 편입되고 싶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욕망을 지적했다. 또한 플로어의 권혁태는 성공한 대한민국의 틀에 맞춰 사후적으로 땜질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지식담론이 형성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어쨌든 정영환은 리버럴의 출현과 일본 전후정치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선 1970년대와 80년대의 맹아적 상황을 중시했다. 80년대 초, ‘전후 정치의 총결산으로 유명한 자민당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등장했다. 자민당에서는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가 내각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당 내부에서는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를 중심으로 자민당 내 리버럴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식의 전략이 등장했다. “그러자 일본 언론에서는 센고쿠에게 리버럴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센고쿠는 오자와인 것이 리버럴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정영환은 자민당이 아니라 오자와라는 표현의 등장을 80년대 정치사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묘사했다. 다시 말해 이 시기 정치적 전선戰線 자체가 리버럴이었고, 이들은 나카소네 이전 자민당의 가치까지 공유하며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맹아는 90년대 초, 사회당과 자민당의 연정으로 성립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연립) 내각의 전사前史로 작동했다. 이것은 다시 2006년 아베 신조阿部信三 내각의 헌법 개정 시도에 대항하는 움직임의 전사가 된다. 이 움직임의 스펙트럼은 좌우를 모두 포괄해야 했고,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슬로건은 민주주의에서 평화주의로, 다시 평화주의에서 평화국가 또는 입헌주의로 후퇴했다. “전후민주주의가 리버럴을 자칭한 것이 아니라 이 표현을 선택한 것 자체가 하나의 전환이라는 해석, 그리고 이어진 다음의 말은 현 단계에서 그의 입론이 지닌 최대한의 독창성일 것이다. “(리버럴의 출현에는)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로서의 전후를 현상적으로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리버럴은 전후 체제의 파괴자인 아베에 대항하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 현실로 받아들였는가. 정영환의 진단에 따르면, 리버럴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고도성장기의 경제정책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되돌아보고있다. 리버럴은 혁신계의 전통적인 주장인 자위대 위헌이 아니라 자위대는 합헌이지만 집단적 자위권은 없다1960년대 자민당의 첫 번째 해석개헌을 수용했고, 이를 토대로 지금의 해석개헌을 비판하고 있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도 기지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못한다. 천황은 헌법을 바꾸려는 아베의 대척점으로서 헌법을 지키는존재로, 리버럴한 군주로 표상되고 있다. 그는 이런 형태의 체제내화가 현재의 일본 사회에 투영된 상황도 언급했다. “2000년대 학생들은 이러한 리버럴한 분위기를 잘 알고 운동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는 쉴즈SHEALDs로 대변되는 학생운동이 담론 내부에 머물렀다는 진단이었는데, “쉴즈의 슬로건인 입헌에는 호헌이든 개헌이든, 헌법에 입각해 있으면 괜찮다는 인식도 포함되어 있다는 조경희의 보충과도 상통할 것이다(자세한 것은 조경희, 2016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정영환은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식민지와 전쟁에 응답한 일본 정부의 노력을 보려는 시도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리버럴이 가진 욕망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아베에 대한 저항은 전후민주주의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맞물렸다. 결국 천황, 평화, 그리고 일본이라는 일국一國으로 연계되는 욕망의 비극은, 리버럴을 역사화하는 와중에 이토록 분명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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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의 책 "망각을 위한 '화해'(忘却のための「和解」)" 및 한국어판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3. 

이후의 토론에서 리버럴이란 표현은 미국식 양당체제를 염두에 두고 정치권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자유주의 부재에 대한 콤플렉스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등등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 리버럴을 어떤 형태로 조감하느냐는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정영환의 시도 자체가 지니는 중요성은 모두 공감했다. 헌법9조와 자위대의 공존을 나시쿠즈시なし하게, 즉 명확한 갈등 관계나 결단 없이”(조경희의 표현)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일본에는 있었다. 정영환은 이 분위기를 리버럴이라고 봤다. 따라서 그가 예의 그 책에 대한 일본 리버럴의 상찬에 어째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 책의 저자가 구조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반성을 전후 일본의 키워드로 이해하는 방식은(박유하-1) 앞서 <<리버럴로부터의 반격>>의 한 구절로 대변되는 현실로서의 전후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당연한 소회이지만, 리버럴은 이 주장을 반박할 것이다. 이미 누군가는 일본 리버럴이 추구했던 바와 합치되는 것이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아사노 도요미 외, 272)고 했다. 또한 2016년 일본에서 있었던, 그 책에 대한 연구집회의 종합토론 때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12·28합의의 철회를 논의의 재출발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자 합의를 왜 출발점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반문이 등장한 장면도 참고할 만하다(0328集會實行委員會, 当日会場での発言記録, 75~78). 그리고 “1990년대 이래 일본의 지적 퇴락’”이라는 정영환의 표현에 맞서 지적 퇴락 현상은 오히려 2016년 여름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다”(박유하-3, 3)는 반박도 존재하는 것처럼 두 입장은 평행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토론 전의 혼란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어떤 거리, 전후 일본의 평화와 민주주의는 지나치게 내향적인 표현이어서 편의주의적인 망각과 자기정당화를 포함하고 있다”(나카노 도시오, 17~18)는 식의 인식과 현실로서의 전후 체제사이의 거리였다. 이 사이에는 단지 다른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골이 있다. 그러니까 사실 어떤 쟁점도 대화로 대처해야 한다”(아사노 도요미 외, 9)는 당위보다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구도나 평행선이어야만 하는 이유에 눈을 돌려야 하는데, 이는 두 입장이 단지 다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리버럴이 이야기했던 대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저 내향성을 감추는 것과 밀접하다면, 그런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실 그 책의 저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새로운관점을 가볍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전쟁책임혹은 전쟁범죄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 국가의 제국책임, 지배책임”(朴裕河·上野千鶴子, 18)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는 저자 나름의 경험적 성찰이 쌓여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출발점은 무엇이 이상한가? 그리고 이 기류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과거 식민지와 과거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진행된) ‘탈식민지화’, ‘국민국가 형성의 과정() 그 이전의 폭력이 낳은 정신적인 외상과의 투쟁이기도 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떠맡아야 할 책임이라고 말한 것, 그리고 그 이전의 폭력가해국과 피해국이라는 이원론을 넘어서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남성중심주의”(아사노 도요미 외, 178~179)라고 규정할 때, 과연 무엇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이 자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다만 저 내향성에 저항해 온 역사적 행위를 통해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2000128일부터 12일에 걸쳐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은 좋은 모범이 된다. 이 법정의 주도적 제안자였던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를 보자. “아시아 몇 억 명의 여성들은 3중의 억압에 고통 받고 있다.”(大越愛子, 44쪽 재인용) 그녀는 현대 페미니즘이 마주 보아야 하는 다른 국면을 이렇게 이해한 것이다. 마쓰이는 여성 욕망의 해방을 중시하는 일본 내 페미니즘 이론이 90년대부터 주류가 되어가자 일본인 여자의 욕망은 아시아라는 시점 속에서 상대화되어야함을 강조했고, 이를 전쟁범죄의 가해자라는 입장을 통해 재음미”(같은 책, 27)했다. 그리고 마침내 법정을 매개로 천황과 국가라는 남성성을 향해 유죄라고 외칠 수 있었다. 이 사상의 궤적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혹시 그녀는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여성들이 서로의 삶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저 구조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 너머에서, 그 구조 내의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 자체가 윤리임을 말해준다.

 

마쓰이는 여성의 욕망을 해방시키되, 윤리에는 기꺼이 속박되고자 했다. 열정적인 저널리스트로서 아시아 여성의 피해를 탐사한 그녀는 일본 여성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위치 짓는다. 그리고 이 피해자성을 여성운동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 가해자로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이로써 피해자는 피해자로만, 가해자는 가해자로만 있지 않을 수 있는, 관계의 새로움이 떠올랐다. 바로 이런 형태의 관계였기 때문에 천황과 국가가 유죄라고, ‘나시쿠즈시なし하지 않게 선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할머니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박유하-2, 313)는 탁월한 지적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화해로 귀결되는 파행적인 궤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내셔널리즘을 벗어나자는 외침이 마치 메아리처럼 돌아온 것이다.

 

결국 리버럴이 가리키는 구조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이로써 어떤 행위자들은 자신이 연루된 그 지긋지긋한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그 책의 저자가 우리 안의 가해성도 봐야 한다고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구조라는 전체성의 세계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이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심정을 갖도록”(아사노 도요미 외, 301~303) 만들었으므로 포착될 만한 의 가해란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二分을 넘는 것은 그것들이 구조 안에서 동등하게 상존함을 이야기하는 것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는 각각의 구체성을 힘껏 살리고, 그것들이 지금까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파악하며, 다르게 연결될 가능성을 만들고, 종국적으로 그 관계를 구조에 대항하는 연대가 되도록 이끄는 방식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해자인 가 할 일은, (뭔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송신도 할머니에게 우러나오는 경의”(첫 인용문)를 표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송신도라는 역사에 기꺼이 속박된 상태에서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과 상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학문과 운동이 관계를 맺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구조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또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일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가 현실의 평화, 민주주의를 국가화하는 데 일조하고, 이로써 무의식적으로 역사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이 있다는 점에는 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또는 post’ 등의 접두어는 더 이상 소비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찾기 위한 무거운 출발점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열린<<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경우처럼 한국의 피해자성을 상대화하는 일도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토론을 준비하고 발표를 듣고, 이를 다시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현상이 지식사회에 나타나고 있음을 대략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어느덧 오타쿠되어가는 나 자신이 반드시 품어야 하는 새로운과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재일조선인에게 남이냐 북이냐묻지 말아주세요”>, <<한겨레>> 2018.5.8

0328集会実行委員会, <<<慰安婦問題>にどううか 朴裕河氏論著とその評価素材(研究集会記録集)>>, 2016.6.27 発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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